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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 혜성과 극도로 소심하고 괴팍했던 아이작 뉴턴
어떤 분야든 ‘역대 최고’를 뽑는 일은 언제나 논란거리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물리학자와 물리학 책을 선정하는데에는 별 이견이 없습니다. 바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과, 그의 책 ‘프린키피아(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줄여서 Principia)’입니다.
1687년에 출판된 이 책에는 그 유명한 F=ma를 포함한 ‘뉴턴의 운동 법칙’과, 질량이 있는 물체는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만류인력의 법칙’이 담겨 있습니다. 뉴턴은 이 법칙을 사용해서 행성의 타원 궤도와 속도를 예측하는 ‘케플러의 법칙’을 증명해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오늘날 ‘미적분학’으로 불리는 새로운 종류의 수학을 발견했습니다. 프린키피아는 뉴턴이 쓴 책이지만, 이 책의 출판에는 뉴턴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헬리 혜성’으로 유명한 에드면 헬리(Edmond Halley)입니다. 아마 헬리가 없었다면 뉴턴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헬리는 17세기 말에 활동한 천문학자로, 헬리 혜성 이야기는 다들 한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오랜 세월 재앙의 징조로만 여겨진 혜성을 과학적으로 연구해서 다음 혜성이 오는 시기를 정확히 예언했지만, 끝내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은 불운한 과학자. 이것이 헬리에 대한 세간의 인식입니다.
헬리는 혜성을 예언하기 전부터도 유명한 천문학자였습니다. 17살에 옥스포드에 입학하고, 20살에 왕실과 동인도 회사의 지원을 받아 남대서양의 외딴섬인 세인트헬레나로 별을 관찰하러 떠날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유배됐던 바로 그 섬입니다.
이미 어릴 적부터 천재 천문학자로 인정 받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헬리는 남반구에서 관측되는 341개의 별을 낱낱이 조사해서 천문지도를 만들었고, 그 공로로 22살의 어린 나이에 영국 왕립 학회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런던으로 돌아오고 몇 년 뒤인 1684년, 28살의 헬리는 행성의 궤도를 결정짓는 법칙에 대해 연구하고 있어습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케플러 등, 선대 천문학자들에 의해, 이 시기에는 이미 지동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케플러는 방대한 천문 자료를 조사해서 행성의 궤도와 속도에 대한 이론을 발표했는데, 오늘날 고등학교 이과에서 배우는 ‘케플러의 법칙’이 그것입니다. 이 법칙에 따르면 행성은 태양 주위를 타원 궤도로 돌고, 그 행성의 속도도 잴 수 있습니다.
케플러의 이론은 당대의 그 어떤 이론보다도 행성의 궤도를 정확하게 예측했고, 헬리를 비롯한 많은 천문학자들이 케플러의 이론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 이론은 ‘법칙’으로 불리지는 못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행성의 궤도가 왜 하필 타원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헬리는 거꾸로 생각해서, 행성이 태양 주위를 타원형으로 돌려면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를 연구했습니다. 행성이 타원 궤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태양이 행성을 끌어당기는 힘이 지속적으로 작용해야 했습니다. 헬리는 이 힘의 크기가 태양과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해야 한다는 ‘역제곱 법칙’도 발견했습니다.
오늘날 중력이라 불리는 힘을 발견한 것입니다. 헬리는 이 힘이 행성의 궤도를 결정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즉, 중력이 행성의 타원궤도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헬리의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왕립 학회에서 이 문제 해결에 상금을 걸기도 했지만, 좀처럼 문제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헬리는 케임브리지에서 아이작 뉴턴을 만났습니다. 헬리는 수학 교수인 뉴턴에게 조언이라도 얻을 생각으로 고민하던 문제를 물어보았습니다.
‘역제곱 법칙을 따르는 힘이 행성에 지속적으로 주어질 때, 행성이 어떤 궤도로 움직여야 할까요?’ 놀랍게도 뉴턴은 질문을 받자마자 ‘타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뉴턴이 이 문제를 이미 오래 전에 풀었다는 것입니다. 뉴턴은 당시 41사의 나이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뉴턴은 지금처럼 인정받는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헬리와는 수년 전에 한 번 만났을 뿐, 특별한 친분도 없었습니다. 헬리가 왜 하필 뉴턴을 찾아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는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뉸턴은 이미 미적분학을 정립하고,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으며, 이 둘을 합쳐서 헬리가 염원하던 ‘케플러 법칙’의 증명에 성공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뉴턴은 이런 어마어마한 업적을 이루고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던 걸까요? 그건 뉴턴이 이 연구 결과를 아무것도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뉴턴의 소심하면서도 괴팍한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뉴턴은 극도로 자기 방어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답지 않게 남의 비판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1670년대에 뉴턴은 교수에 임용되면서 한 광학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왕립 학회에서 인정받을 정도로 훌륭한 연구였지만, 과학 연구라면 으레 있는 비판 하나하나에 뉴턴은 큰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특히나 왕립 학회의 선배였던 로버트 훅(Robert Hooke/용수철의 원리를 밝혀낸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물리 및 천문학자)은 뉴턴을 여러 차레 비판했고, 뉴턴이 자기 아이디어를 도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시달린 유턴은 신경 쇠약을 앓더니, 급기야 학계와의 연을 끊고 잠적해 버렸습니다.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기 싫었던 뉴턴은 그 어떤 연구 결과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뉴턴의 모든 위대한 연구는 헬리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저 뉴턴의 방 안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뉴턴의 대답에 충격을 받은 헬리는 뉴턴에게 그 연구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뉴턴은 자기 연구를 정리해서 9쪽의 논문으로 만들어 헬리에게 보냈습니다. 헬리는 논문을 읽고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가 고민하던 ‘케플러의 법칙’이 정말로 완벽하게 수학적으로 증명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헬리는 이 연구가 천문학의 역사를 바꿔놓으리라는 걸 깨달았고, 뉴턴에게 책으로 출간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마침 헬리가 왕립 학회의 서기로 일하게 되면서 책의 편집을 맡게 되었습니다. 뉴턴은 이 후 몇 년간 먹고 자는 것을 잊어가면서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역사 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 책인 ㅣ’프린키피아’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1권이 완성된 후, 이전에 뉴턴을 학계에서 잠적하게 만들었던 로버트 훅이 또 한 번 뉴턴에게 딴지를 걸었습니다. ‘행성을 끌어당기는 역제곱의 힘’, 즉 중력이라는 아이디어는 본인이 원조인데, 뉴턴이 이를 도용했다는 것입니다. 훅이 이전에 비슷한 연구를 하기는 했지만 표절 시비를 걸기에는 사실 무리한 수준이었습니다. 다시 신경쇠약에 걸린 뉴턴은 결국 프린키피아의 집필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헬리가 또 나서야 했습니다. 헬리는 뉴턴과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뉴턴을 다독여야 했습니다. 결국 책의 일부분에 훅의 이름을 언급하는 선에서 둘 사이의 타협점을 찾았습니다. 책이 완성된 다음에도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왕립 학회는 피린키피아 이전에 ‘물고기의 역사(De Historia Piscium)’라는 책의 출판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양의 삼화 때문에 학회는 큰 돈을 썼지만 책은 거의 팔리지 않았고, 학회는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격게 되었습니다. 프린키피아 출판에 지원하기로 한 돈을 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 비용을 부담한 사람이 또한 헬리였습니다. 헬리는 프린키피아 출판을 위해 왕립학회의 연봉을 포기했습니다. 학회는 그 대가로 헬리에게 안 팔리고 남은 ‘물고기의 역사’ 책을 주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프린키파아는 출판되자마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행성을 끌어당기는 힘’인 중력을 우주 만물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힘으로 확장시켰고, 자신의 중력 이론을 달, 혜성과 같은 다른 천체의 분석에도 적용했습니다.
당대의 뛰어난 천문학자들도 혜성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케플러조차 혜성은 그저 단순히 직진하면서, 태양에 부딪혀 사라지거나 영영 멀어지는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뉴턴은 혜성도 행성과 같은 중력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특정 조건에서는 행성처럼 타원을 그리며 움직일 수도 있음을 밝혔습니다.
이 아이디어를 완성시킨 사람이 헬리였습니다. 헬리는 사실 이전부터 혜성에 관심이 많았고, 뉴턴을 만나기 2년 전인 1682년에 혜성을 직접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프린키피아 이후 헬리는 혜성 연구에 더욱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뉴턴의 이론을 적용해 혜성이 지구를 주기적으로 지나간다는 점을 알아냈습니다. 또한 디테일한 계산을 통해 이 주기가 대략 76년이며, 따라서 다음 혜성은 1978~59년 사이에 지구를 지나가리라고 예측했습니다.
당대에는 혜성이 지구를 주기적으로 지나친다는 것조차 급진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헬리의 연구에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헬리도 혜성이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1742년에 눈을 감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뉴턴 이론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자, 헬리의 주장도 신빙성이 더해 갔습니다.
1758년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혜성을 기다렸고, 마침내 그 해 크리스마스에 혜성이 관측되면서 헬리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헬리의 예언 실현은 단순히 헬리의 승리가 아니라 뉴턴 이론 전체의 승리였습니다. 헬리 혜성의 예측은 순전히 뉴턴의 중력 이론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고, 따라서 이 발견은 뉴턴 이론의 완벽한 검증을 뜻했습니다.
뉴턴의 발굴자이자 프린키피아의 편집자, 투자자, 중재자이기까지 했던 헬리가, 마침내는 프린키피아와 뉴턴 중력이론의 완성자가 된 셈입니다. 어쩌면 헬리가 없었더라면 뉴턴의 성격으로 보아 그의 연구 결과가 영원히 사장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랬더라면 이류의 발전은 결코 오늘 날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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