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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이 폭발적으로 팽창한 이유와 초심을 잃은 이슬람교의 결말

이슬람만큼 빠르게 팽창한 종교는 없습니다. 610년 메카에서 출범한 이래, 이슬람은 순식간에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북아프리카와 이란, 인도, 파키스탄, 중앙아시아로 전파되었습니다.

 

현재 이슬람을 믿는 나라들의 절반이 초창기에 이미 만들어졌죠. 거기에 8세기 중반에는 중앙아시아에서 벌어진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를 대파함으로써 중국의 서역 진출의 꿈을 완전히 포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초기 이슬람의 전파는 이들이 만든 이슬람제국의 영토와 완벽히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제국 자체가 정복을 통한 이슬람의 포교를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슬람의 영토는 로마제국의 거의 2배에 달했습니다. 그것도 로마가 900년이 걸린 데 반해 겨우 100년 만에 이뤄낸 성과입니다. 이 전무후무한 속도의 팽창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물론 이슬람에선 알라의 뜻이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이 영상에선 종교적인 측면은 모두 배제하고 이 놀라온 일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시대적 배경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우선 이슬람은 ‘때’를 아주 잘 만났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시기 이 지역에선 서양을 대표하는 비잔틴(동로마)과 동양을 대표하는 페르시아(사산왕조), 이 두 거대 제국이 패권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나머진 이 두 나라의 위세에 눌려 숨도 쉬기 어려웠죠.

 

하지만 300년 넘게 싸워오면서 비잔틴도, 페르시아도 이젠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무리한 소모전이 끝도 없이 어어지면서 쿠데타 같은 정치 혼란이 반복되었고 전비 마련을 위한 가혹한 세금과 약탈로 민심이 모두 떠난 상태였습니다. 그야말로 이 혼란을 끝낼 새로운 세력의 출현을 모두가 기다리는 분위기였죠.

이 두 나라의 힘을 쏙 빼놓은 게 또 하나 있었으니 페스트입니다.

6세기 중반 이집트에서 시작된 페스트는 곧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 터키 이스탄불)로 퍼졌습니다.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사람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심한 날엔 하루에 1만 명이 한꺼번에 페스트로 죽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비잔틴 인구의 40%가 단기일 내에 사라졌습니다.

 

전염병은 당연히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머지않아 페르시아에도 페스트가 상륙했습니다. 페르시아 인구의 25%가 사라졌습니다. 이 중에는 페르시아의 왕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페스트는 두 제국을 똑같이 기진맥진하게 만들었습니다.

 

반면 이슬람의 아라비아 반도는 페스트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이 사막이라 페스트를 퍼뜨리는 곰쥐가 서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도시에 밀집해 사는 비잔틴과 페르시아와 달리 아라비아 반도의 유목민들은 대부분 사막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페스트를 피하는 데 절대적으로 유리한 환경이었죠.

만약 오랜 전쟁과 페스트로 이 양강의 힘이 약화되지 않았다면 역사상 유례없는 이슬림의 급속한 전파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지역이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영향권이라 자신들을 위협하는 제 3세력의 성장을 두고만 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국제적인 환경이 유리하더라도 스스로 충분한 힘을 갖추지 못했다면 이슬람이 이처럼 거대해지지는 못했을 겁니다. 사실 아라비아 반도는 경제적으로 굉장히 낙후된 지역이었습니다. 부족 단위로 사막과 초원을 떠돌며 양이나 치던 게 고작이었죠. 적은 목초지와 오아시스를 두고 건듯하면 부족 간에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경제력이 쌓일 여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비잔틴과 사산조 페르시아 간의 장기 전쟁이 아라비아 반도에 의도치 않은 경제 변화를 가져왔죠. 페르시아에서 지금의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을 거쳐 지중해에 이르던 전통 교역로가 차단되자 대상들은 새로운 루트를 찾아야 했습니다. 아라비아 사막을 가로지르거나 서부의 홍해 연안을 따라가는 거죠. 이 덕에 메카, 메디나 같은 도시가 발달하고 중계무역으로 전에 없던 호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슬람에서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우리가 흔히 이슬람의 창시자라고 부르는 무함마드도 대상로의 요지 중 하나인 메카의 상인 출신이죠. 어쨌든 이런 변화 덕에 이슬람은 정복 전쟁의 경제적인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정복 전쟁을 하려면 강력한 군대가 반드시 있어야지요.

 

이 문제 역시 결과적으로는 양대 제국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비잔틴도 페르시아도 오랜 전쟁으로 인력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수많은 용병을 고용하고 있었습니다. 지리적으로 구하기 쉬웠기 때문에 두 나라의 국경을 지키는 군사의 대부분이 아랍인이었죠. 이들은 유목이나 농사보다 수입이 훨씬 좋았기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선진 제국의 전쟁 전술을 익힌 이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정복을 이끄는 최고의 전사들이 되었죠.

 

새로운 무역로 덕에 만들어진 경제력과 용병으로 다져진 군사력은 분명 정복 전쟁의 든든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의 전광석화 같은 확대를 가져온 두 가지 결정적인 요인은 포용 정책과 조세 정책이었습니다. 당시 이슬람 세력은 그 숫자가 아주 적었습니다. 그 넓은 정복지를 직접 다스린다는 건 불가능했죠.

그래서 이슬람 제국은 그 이전의 제국과는 전혀 다른 통치 시스템을 사용했습니다.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토착세력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간접 통치를 한 것이죠. 전쟁에서 패하면 죽거나 노예로 팔려나가던 시대였습니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관용정책이었죠. 심지어 세금만 낸다면 그 어떤 종교도 허용되었습니다. 물론 기독교를 믿어도 됐지요.

 

이런 제도를 딤마(Dhimma)라고 했고, 무슬림이 아닌 국민을 딤미(Dhimmi)라고 했습니다. 이슬람 세력뿐 아니라 아랍의 유목민 자체도 숫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적정한 인구는 꼭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딤마 제도를 통해 피정복민을 보호하고 대신 세금이라는 실리를 취했던 것입니다.

 

당시 주변국들의 민중에게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던 건 이슬람의 조세 정책이었습니다. 이슬람 제국에선 25%의 토지세만 내면 누구든 땅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맘껏 농사도 짓고, 경작물도 가질 수 있었지요.

 

비잔틴과 페르시아 제국의 가혹한 수탈에 신물이 났던 사람들에게 이 제도는 가히 혁명이었습니다. 여기에 10%의 인두세만 내면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이슬람은 여타 종교들로부터 큰 거부감도 없었습니다.

특히 그간 유럽 가톨릭으로부터 이단으로 몰려 핍박을 받던 콥트 기독교, 네스토리우스파, 단성론자, 아랍에 살던 일부 유대교들은 이슬람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자, 오히려 이들을 해방군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초창기 이슬람의 정책은 단순하게 표현하면 개종과 세금, 그리고 죽음 중에서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슬람을 믿어 구원을 얻거나 그렇지 않으면 세금을 내고 자신들의 보호를 받으라는 것이죠. 그런데 세금을 내면 기득권은 물론 자신의 종교도 지킬 수 있었고 그 세금마저 비잔틴이나 페르시아보다 훨씬 쌌기 때문에 이슬람은 많은 곳에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나중엔 싸우지도 않고 도시 통째로 투항해오는 곳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이게 바로 이슬람이 파죽지세로 세력을 확장한 비결이죠.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10%의 인두세마저 깎아 주었기 때문에 나중엔 아랍에 살던 기독교 집단과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대거 개종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세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바람에 집단 개종을 못하게 막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이슬람 제국은 사상 처음으로 종교가 지배이념이 된 제국이었습니다. 이 덕이 무함마드가 죽은 후에도 정통칼리프와 우마이야왕조, 아바스 왕조로 이어지면서 분열 없이 이슬람의 확산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급격하게 몰락한 헬레니즘 제국과는 완전히 달랐죠.

이후 이슬람은 절정기를 맞았습니다. 아랍은 그리스 로마 시절 겪었던 1천 년의 설움을 날리고 그와 똑같은 1천 년간이나 유럽 문명을 앞서게 되죠. 이들이 이 시기에 그리스 학문을 연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자연과학, 수학, 천문학, 의학, 화학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남기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과학기술은 지금의 수준에 결코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어 국명이 코리아가 된 것도 아랍 상인들이 이슬람의 황금기에 고려를 세계에 소개해준 덕이죠.

 

하지만 18세기 말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한 이래, 아랍과 유럽 간의 힘의 우위는 다시 역전되었습니다. 이슬람은 초기와 같은 포용력도, 종교로 다져진 단결력도 빛바랜지 오래입니다.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눠 곳곳에서 피 흘리는 분열부터 해결하지 못하면 아랍은 서방 세계에 휘둘리는 1천 년간의 세월을 다시 지내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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