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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란 나라가 조만간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역사에 있다

요즘 한 국회의원으로 인해 이해충돌방지법이란 용어가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3선이나 한 이 의원은 무려 6년 동안이나 자신과 이해가 맞아 떨어지는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기간 가족이 운영하는 건설사들은 국가로부터 수천 억 원의 공사를 특혜 수주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한동안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김영란법이 제대로 통과만 됐더라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2012년에 제안된 김영란법의 원래 이름은 ‘부정청탁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방지법’이었습니다.

이 중 이해충돌방지법은 쏙 빠지고 부정청탁금지법만 통과된, 반쪽짜리 법안이 지금의 김영란법입니다. 국화 심의 과정에서 이해충돌 방지법의 적용범위가 ‘너무 포괄적이다’는 이유로 일부 의원들이 극렬하게 반대해 통째로 삭제된 것입니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의 ‘기득권 지키기’라는 비난은 그때나마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알고 보면 이해충돌방지법은 굉장히 역사가 오래된 법입니다. ‘고려사절요’라는 책이 있습니다. 조선 초에 김종서 등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고려역사서이죠. 이 책에 따르면 이해충돌 방지법은 고려 시대부터 있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1092년 고려의 제 13대 왕인 선종 때, “오복 친족에 대한 상피법을 정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오복이란 장례 때 상복을 입는 예법을 말합니다. 즉, 몇 촌까지 상복을 입느냐 이런 걸 정한 건데, 오늘날로 치면 8촌까지입니다.

상피라는 한자는 ‘서로 상’에 ‘피할 피’이니 서로 피한다는 뜻입니다. 즉, 8촌까지는 서로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무얼 피하느냐… 고려에선 8폰 이내 친족은 같은 부서나 근무지에서 일 할 수 없었습니다. 같은 곳에서 일하면 친척끼리 손잡고 쉽게 부패할 수 있다고 보았던 거죠. 거기다가 8촌 이내의 촌족이 죄를 지었다면 그 재판을 맡을 수도 없었습니다. 8촌 이내의 친족이 시험을 본다면 그 시험의 감독관이 될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피제는 팔이 안으로 굽을 여지를 미리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아주 가까운 친인척 간에는 공정성을 유지하기가 아무래도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영란법의 주인공인 김영란 전 권익위원장은 “이해충돌 방지 규정이 반부패정책의 핵심”이라며, ‘이해충돌’에 대해 “공무를 수행함에 있어 공직자 자신의 사적 이해관계가 공정하고 청렴한 직무수행이 저해되는 상황”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해관계가 같을 수 있는 사람 간에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근무지도, 재판도, 시험도 같은 자리에 있는 걸 피해야 한다는 고려 시대의 상피법과 기본 취지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죠.

 

하지만 고려는 귀족 국가였습니다. 상피법이 제대로 실행되기에는 이미 귀족들의 세력이 사회 곳곳에 뿌리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형식 상 법은 엄격하지만 애초부터 구조적인 한계가 있었던 것이죠. 상피법이 본격적으로 실시된 것은 조선 때입니다. 새로운 국가의 건설로 개혁의 기운이 넘칠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 방안 중 하나가 전면적인 과거제 시행입니다. 고려 말 귀족 집안의 권력 독점이라는 폐해를 지긋지긋하게 겪은 게 조선을 개국한 신진사대부들입니다.

이들이 도입한 과거제는 공정한 관리 등용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동시에 귀족 명문 집안의 몰락을 겨냥한 것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이 만든 상피법은 과거제에 이어 권력의 집중, 전횡을 박으려는 이중 장치였던 셈입니다. 상피제도에 대한 상세한 규정은 세종 때 이루어졌습니다.

세종대왕은 상피법이 적용되는 범위를 고려의 8촌에서 4촌으로 줄였습니다. 8폰까지 피하느라 재판이 지나치게 지연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4촌내의 법 적용은 고려와는 비할 바 없이 엄격했습니다. 만약 내가 강릉에서 군수를 하고 있는데 내 사촌 중 한명이 강원도 관찰사로 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난 바로 강릉군수를 내놓고 경상도나 충청도로 가야 합니다. 만약 자리가 없다면 졸지에 대기발령 신세지요. 지금으로 치면 최문순 강원도지사의 4촌내 친척은 강원도에서 고위 공무원을 지내는 건 꿈도 꿀 수 없습니다. 물론 지금은 선출직이라 상피법과는 아무 관련이 없지요.

 

조선 최고의 석학인 퇴계 이황 선생은 48세의 늦은 나이에 단양 군수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의 형이 충청감사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 덕망 높은 대학자조차 즉시 단양군수에서 물러나 경상도 풍기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만큼 조선의 상피법은 엄격했습니다.

 

조선 최고의 천재인 율곡 이이와 조선 최고의 영웅 이순신 장군은 무도 덕수 이씨로 같은 집안사람입니다. 항렬로는 이순신이 높아 아저씨뻘입니다. 하지만 나이는 율곡이 아홉 살 위입니다. 당시 율곡은 이조판서였습니다. 이조는 지금으로 치면 행정안전부와 인사혁신처를 겸하고 있었습니다. 판서는 장관이니 율곡은 행안부 장관인 셈이지요.

반면 40이 넘도록 미관말직으로만 돌았던 이순신은 정8품의 보잘 것 없는 훈련원 봉사였습니다. 서애 유성룡의 소개로 이순신을 알게 된 율곡은 “같은 집안인데 한번 찾아 오시게”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같은 문중으로서 인사권을 가진 이조판서를 만날 수는 없습니다. 대감이 판서를 그만두시거나 제가 훈련원 봉사를 그만 두면 그 때 찾아뵙겠습니다.”

 

율곡과 이순신간의 촌수를 굳이 따진다면 19촌정도 됩니다.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죠. 조선시대의 상피제에 걸릴 일이 없는 정말 멀고도 먼 촌수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일화를 남아 있는 것은, 물론 이순신이 특별나게 청렴, 강직한 인물이기도 했겠지만 그만큼 사회 전반에 상피제를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엇다는 뜻일 것입니다. 말이 4촌내이지 위정부와 의금부, 사헌부, 사간원 같은 권력 핵심 기권들은 법외라 하여 규정보다 먼 친척 사이라도 상피제가 적용되었습니다. 몇 촌인지 상관없이  같은 문중이라면 아예 등용을 피하고 보는 식이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를수록 상피제는 더욱 확대돼 지방에 연고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 지방의 벼슬아치로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왕의 특별한 허락이 있는 경우엔 친인척 간에 같은 부서나, 같은 지역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에도 괸리들의 집요한 탄핵 대상이 되곤 했기 때문에 왕이 견디질 못하고 철회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상피법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피혐이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피할 피에 혐은 의심스럽다는 뜻입니다. 즉, 의심 받을 짓은 피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는 사헌부에서 일하는데 사실이든 아니든 구설수에 휘말릴 경우 조사의 공정성을 위해 그 일을 중지하고 집에서 근신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일이 클 경우에는 사헌부 전체가 일을 중지하고, 다른 기관에 조사를 맡기기도 했습니다. 이게 피혐입니다. 이것 역시 근본 취지는 이해충돌방지입니다.

 

이런 제도와 법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전세계 왕조 역사상 매우 드물게도 500년 이상이나 존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고로 기원 후 중국은 300년 이상 유지된 왕조가 송나라뿐입니다. 무려 1000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이해충돌방지법. 지금의 우리나라에선 공직자윤리법에 ‘이해충돌 방지 의무’만 명시해 놓고 있을 뿐 처벌 규정은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려나 조선에 비해 낫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특권이 없는 공정한 사회로 가는 길은 여전히 쉽지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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