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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의료로 시작된 최면술로 과연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일까?
최면은 참 판타지한 분야입니다.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마구 넘나드니 말입니다. 우선 쓰임새 자체가 다양합니다. 병원의 의료 수단인가하면 경찰의 수사 도구이고, 어떤 땐 마술쇼의 소재이기도 합니다. 물론 영화에도 단골로 등장하죠.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에서 이우진이 복수를 위해 오대수에게 최면을 거는 것처럼 말이죠.
근대의 최면은 18세기의 사이비 의술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독일의 의사 프란츠 안톤메스머(Franz Anton Mesmer)에겐 심한 경련과 구토에 시달리던 환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메스머는 환자에게 철이 든 용액을 먹이고 자석으로 온 몸을 짚으며 증상을 관찰했습니다. 환자는 몸 안에서 어떤 에너지가 요동치는 것을 느끼면서 발작 증세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이유에선지, 환자는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자석 치료를 몇 번 더 실험해 본 뒤 메스머는 급기야 본인의 손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기운이 발산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말로 자기 몸에 어떤 기운이 들어온다고 믿는 환자들은 이 과정에서 경련하거나 갑작스레 울고 웃고 소리치는 등의 이상한 증세를 보이곤 했습니다. 메스머는 이것이 막힌 기운이 뚫리며 일어나는 일이라 설명했습니다.
‘최면’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메스머리즘(mesmerism)이 여기서 탄생했는데, 원래는 메스머의 치료법을 뜻하는 단어였습니다. 지금으로선 무척 수상쩍어 보이는 이 치료법은 의외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한 가지 이유는 당대의 의료 수준이 처참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무슨 병이든 일단 피를 뽑는 게 기본이었고 피를 뽑는 기구나 거머리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 방법은 매우 고통스러웠고 딱히 효과가 뛰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메스머의 요법은 적어도 고통스럽지는 않았습니다.
메스머가 1778년 파리로 이사하고 나선 메스머리즘의 인기가 더 높아졌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마저 소문을 듣고 찾아올 정도였습니다. 때로는 200명이 넘는 환자가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들 하나하나를 개인적으로 살필 시간이 없던 메스머는 아예 집단 진료를 했습니다. 집단 진료는 그야말로 사이비 종교 집회를 방불케 했습니다. 넓고 어두운 방에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메스머는 환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손으로 기운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손짓을 받은 환자들은 경련하거나 소리치고, 심지어는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편 주류 의학계에선 메스머리즘을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무시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무시하기엔 인기가 너무 커져갔습니다.
왕립 과학원은 루이 16세의 명을 받아 메스머리즘을 조사하는 조사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위원회에는 프랑스의 쟁쟁한 과학자들이 참가했고, 그 중에서도 미국 대사로 와 있던 벤자민 프랭클린이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인 프랭클린은 피뢰침을 발명한 전자기 현상의 전문가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프랭클린 조사회는 메스머리즘이 환자의 상상이나 믿음 등의 심리 상태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뒤에 숨어 몰래 손으로 기운을 불어 넣은 환자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가짜 약도 마음가짐에 따라 효력이 발생하는 현상을 플라시보 효과라고 부릅니다. 의학 실험에서는 새로운 치료법이 실제 효과가 있는지 아니면 단지 플라시보 효과일 뿐인지를 구별하기 위해 환자에게 가짜 약을 주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수행합니다.
프랭클린 조사회의 실험은 플라시보 효과와 블라인드 테스트의 원조로서 이후의 의학 실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랭클린의 조사 이후 메스머는 파리를 떠나 은퇴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이 메스머도 몰랐던 특이한 증상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환자들은 경련 등의 전형적인 증상 대신 아주 특이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환자는 잠이 든 것 같은 멍한 상태였지만, 그 상태에서 의사의 질문에 답하거나 시키는 행동을 따라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통증 등의 자극에는 무감각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오늘날 트랜스(Trance)상태라고 부르는, 정말로 최면에 가까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트랜스 상태가 가진 신비로운 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이 상태를 ‘영혼을 치유하는’ 의식처럼 생각했습니다. 이런 관점은 19세기 초반 영국에서 특히 유행했고 메스머리즘은 의사들이 아닌 민간 치료법이 되었습니다. 찰스 디킨스가 메스머리즘을 공부하고 가족이나 친구들을 치료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메스머리즘의 영적인 측면이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트랜스 상태에 빠진 인간이 텔레파시나 투시와 같은 초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미스터리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이코메트리’라는 단어도 이때 등장했습니다. 물건을 만지는 것만으로 상대방을 읽어내는 초능력을 말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의사 제임스 브레이드(James Braid)는 트랜스 상태를 의학적으로 쓸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트랜스 상태에 빠진 사람은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것이 마취제를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그가 활동한 19세기 중반에는 클로로포름과 같은 화학적 마취제가 막 발명되었는데 워낙 유독한 물질이라 마취 도중 환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환자가 한 곳을 계속해서 응시할 때 트랜스 상태에 빠지기 좋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최면하면 떠오르는 ‘흔들리는 시계추’가 바로 이겁니다.
그와 몇몇 의사들은 최면을 실제로 수술에 마취제 대용으로 사용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브레이드는 메스머리즘이란 단어가 가지는 오컬트 혹은 미신적인 이미지를 경계해서 Hypnosis라는 새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잠의 신’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죠. 이는 지금까지도 메스머리즘과 함께 최면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트렌스 상태의 신비로움을 대중 앞에 보여주는 쇼도 생겨났습니다. 주로 마술에서 지원자를 트랜스 상태로 이끈 뒤,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환각을 보게 하는 등의 쇼를 시연한 것입니다. 이런 ‘무대 최면쇼’는 19세기 후반에 크게 유행해서 유럽과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20세기 후반에는 최면술이 ‘기억 회복술’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트렌스 상태에 빠진 환자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해 보면 깨어있을 때에는 기억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이는 주로 범죄 수사에 쓰였습니다.
1968년 미국에서는 기억 상실을 겪던 성폭행 피해자가 최면으로 기억을 회복해 증언한 것이 법정에서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되살아난 기억이 진짜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최면을 통해 얻은 증언이 실제와 다른 경우가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죠.
최면 치료를 받은 이들이 어릴 적 부모에게 성적인 학대를 당했다거나 외계인에게 납치를 당한 적이 있다는 주장도 꽤 있었습니다. 이들은 되살아난 기억에 강한 확신을 가졌지만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없었습니다.
1990년대에 과학자들의 연구 끝에 최면이 가짜 기억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최면 수사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최면을 통한 수사는 법적인 효력을 갖지 못합니다. 다만 최면은 지금도 범인의 몽타주를 그리거나 뺑소니 차량의 번호판을 기억해내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최면에 대한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직 최면과정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최면은 수면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뇌파 측정으로 알 수 있는데, 최면은 뭔가에 몰입해 다른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스마트폰에 빠져 차가 오는 지도 모르는 경우와 비슷한 거죠. 이 말은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최면에 안 걸릴 수 있으며, 최면상태라도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은 말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최면을 하는 마술쇼를 보면 최면술사가 상대방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흥미를 위한 과장된 설정일 뿐입니다.
‘올드 보이’에서의 최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마술쇼와 영화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최면에 걸려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런 최면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숙련된 최면술사라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겠다는 자발적인 의지가 없는 사람에겐 최면을 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거죠. 이런 걸 볼 때마다 인체의 신비는 특히, 뇌의 신비는 참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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