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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의 시작에서부터 암묵적인 룰까지.. 결투충들이 만들어낸 유럽사회 분위기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시킨, 10달러 지폐의 주인공이자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해밀턴, 바람둥이의 대명사인 카사노바, 자본론을 쓴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 미국의 부통령인 애런 버,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인 갈루아. 미국 7대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이긴 영국의 총사령관 웰링턴,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프루스트.
이 다양한 인물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목숨을 건 결투를 해본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이 중 푸시킨과 해밀턴, 갈루아는 결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중 애런 버와 앤드류 잭슨은 결투로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그 외에 결투를 한 전력이 있는 사람을 꼽자면 끝도 없습니다.
영국 수상 윌리엄 피트, 프랑스 수상 조르주 클레망소, 음악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헨델, 미국의 유명작가인 마크 트웨인,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도 있습니다.
신사 이미지가 강한 미국 대통령 링컨도,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도 결투신청을 한 바 있고, 프랑스의 나폴레옹조차 늘 결토에 대비해 결투용 권총을 갖고 다녔습니다.
이처럼 온갖 유명인사들이 나셨을 정도로 결투는 서구 사회에서 꽤나 일반적이었습니다. 오랜 역사나 그 빈도수로 보아 이 정도면 서구 사회를 특징 짓는 하나의 문화라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결투는 비록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더라도 서구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러 요소들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요소들이 모두 하나같이 무척 흥미진진합니다.
결투는 언제부터 시작 되었을까요?
결투의 원조는 확실치 않습니다. 1세기 경 개인 간의 분쟁을 결투로 해결한 게르만족의 관습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긴 합니다. 하지만 바이킹도 그랬고, 다른 대부분의 민족들도 그랬습니다. 분명한 건 중세 초가 되면 결투가 정식 재판 중의 하나가 되었고,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적인 결투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결투 재판은 대개 증거가 애매한 중범죄 사건에서 벌어졌습니다. 중세시대답게 기독교가 그 배경입니다. 즉, 하나님이 정의로운 자를 승리하게 할 것이란 믿음이 그 밑바탕에 있습니다. 따라서 결투에서 승리한 자가 무죄가 되고, 패한 자는 유죄가 되었습니다. 패자는 교수형에 처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의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반칙을 일삼는 자가 승리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결국 힘세고 싸움 잘하는 사람이 무죄가 되었습니다. 이런 폐단이 커지자 결투 재판은 15세기 경 중단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향을 받아 16세기 부터 20세기 초까지 목숨을 건 사적인 결투는 계속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결투를 할까요?
보통 죽음을 각오한 싸움이니 그 목적이 처절한 복수나 필사적인 승리를 연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유럽 남성들에게 결투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건 ‘목숨 걸고 싸웠다’ 는 그 자체입니다. 결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명예회복과 용기를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신사들은 명예에 죽고, 명예에 살았습니다. 최소한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투가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유가 명예 관련이었습니다. “그깟 명예가 뭐라고 목숨까지 걸까? 싶지만 당시 명예가 갖고 있는 사회적 무게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쉽게 말해서 공개적인 모욕을 당해 명예가 실추되었는데도 결투를 신청하지 않으면 그냥 산송장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럼 사교모임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무도회도 갈수 없었으니 결혼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당시 주류 남성들에게 ‘명예는 남자의 모든 것’ 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결투를 받은 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사과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칫 결투를 두려워하는 비겁자로 몰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결투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이렇듯 결투는 상대를 죽이는 게 아니라 “명예 회복을 위해 두려움 없이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사람” 임을 남에게 잘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결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결투는 사실상 상류계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평민들은 훼손당할 명예도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평민이 귀족에게 결투를 신청했다면 그냥 맞아 죽기 십상입니다. 물론 먹고 사느라 결투 같은 걸 생각할 여력도 없었습니다. 아주 간혹 평민과 상류계급 간에 결투가 일어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평민이 이길 경우 살해를 당할 위험이 아주 커서 결투 후에는 잽싸게 그 마을에서 도망쳐야 했습니다.
암튼 주로 결투를 한 사람들은 귀족과 문인, 저널리스트 등 소위 신사 계급이었습니다. 이들 계급끼린 명예가 모욕당했다면 설혹 윗사람이라고 해도 결투를 신청할 수 있었습니다. 상대를 모욕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거짓말쟁이’ 혹은 ‘겁쟁이’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는 명예를 중시하는 당시의 신사계급에게 가장 심한 욕이었습니다. 이런 욕을 하면 대부분 결투로 이어졌습니다.
유럽에서 결투는 근대에 들어선 18~19세기에 가장 자주 벌어졌습니다. 새로 탄생한 자본가 계급들까지 결투 대열에 합류했기 때문입니다.
결투를 신청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결투 신청은 그냥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장갑을 벗어 상대방 근처로 던져야 합니다. 말을 타고 창찌르기 대결을 하던 기사들이 손을 감싸던 두툼한 장갑인 건틀렛(Gauntlet)을 던져 도전 의사를 밝히던 것이 유래했습니다. 당시 신사들은 장갑을 끼는 것이 매너 중의 하나라 대갠 늘 장갑을 갖고 다녔습니다. 상대가 이 장갑을 주어 들면 결투를 받겠다는 표시가 됩니다. 물론 머뭇거리다간 겁쟁이 소릴 들을 수 있으니 덥석 집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18~19세기에는 장갑이 아닌 정중한 편지 형식의 결투 초청장을 보내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결투를 신청할 수 있는 조건은?
결투를 신청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건은 명백한 명예 훼손을 당했을 때뿐입니다. 상대가 싫다고, 혹은 믿다고 임의로 결투 신청을 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결투의 남발을 막기 위해 결투 신청자는 명예 훼손 당한 경위를 모두 문서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입증해 줄 증인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증인의 진술, 역시 모두 서면으로 만들어 둬야 합니다. 입회인은 문서가 미흡할 경우 결투를 못하게 막기도 했습니다.
명예를 더럽혔다고 아무한테나 결투를 신청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론 같은 계급이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결투를 신청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투를 자제해야할 대상도 불문율처럼 있었습니다.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신사로 대접 받지 못하기 때문에 꽤 엄격하게 지켜야 했습니다.
우선 당연하지만 성직자와 여성, 그리고 장애인은 결투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16살 이하나 60살 이상의 남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귀한 집 자손도 피해야 할 대상입니다. 남자 후계자가 한 명 뿐인 귀족 집안에 결투 신청했다간 피도 눈물도 없는 비열한 인간 취급받기 십상입니다. 아무리 모욕을 당했다 해도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치는 당시 분위기 상 이런 귀한 자손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 그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중요 인물이나 존경받는 인물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것도 몹시 무례한 일이었습니다. 대가족의 아버지인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칫 많은 사람들의 생계를 어렵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 영웅이나 군장교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것도 철부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전쟁 중이거나 전염병이 돌 때는 그 어떤 결투 신청도 신사라면 해서는 안 되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결투를 안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
결투를 받아들이는 게 두려울 수도 있고, 생각해보니 자신이 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애초부터 부조리한 결투에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세상은 그에게 ‘겁쟁이’ 라는 딱지를 붙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낙인은 어디든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으로 남자로서의 삶은 끝났다고 해도 무방한 사회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니 평생을 멸시 속에서 살아야 하는 굴욕을 감수하지 않는 한 결투를 피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결투에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건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평생 겁쟁이가 되어 왕따로 사는 것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결투를 피한 남성뿐 아니라 그 가족 모두의 사회적 지위가 함께 추락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결투 상대자가 사정이 생겨 늦는다면 기다려주는 시간은 딱 15분이었습니다. 이 이상 늦으면 결투를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결투하는 사람들은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일찌감치 합의된 장소에 나와 대기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결투까진 어떤 과정을 밟을까?
결투가 성사되면 제일 먼저 할 일은 세컨드(Second)라고 불리는 입회인을 선정하는 것입니다. 세컨드는 결투를 참관한 경험이 있고, 이 결투의 원인을 잘 아는 사람 중에서 선발했습니다. 세컨드는 대개 각각 2~3명씩 두었는데 이 중 대표를 뽑아 겨루의 시작과 끝을 선언하는 역할을 맡겼습니다. 이게 정해지면 결투 당사자들끼리 결코 만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세컨드가 하는 첫 번째 일은 중재입니다. 우선 양측의 입회인들끼리 만나 화해를 모색합니다. 화해가 가능하다면 사과의 수위까지 조절합니다. 화해가 불가능하다면 결투 준비에 들어갑니다. 이들은 결투할 장소와 시간을 협의하고 사용할 무기도 결정합니다.
칼을 사용하기로 했다면 피를 흘릴때까지 싸울 것인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인지 결투의 수위도 정합니다.
총이라면 순서대로 쏠 것인지, 동시에 쏠 것인지, 전부 몇 발까지 쏠 것인지도 합의합니다.
이런 세부 사항이 결정되면 세컨드는 의사를 데리고 결투를 입회하러 갑니다. 그리고 좀 더 격식 있는 결투라면 관과 그 위를 덮을 천까지 준비해 결투장소로 가게 됩니다.
결투는 어떻게 진행될까?
결투 시간이 되면 세컨드의 대표자는 화해의 의사가 있는지 재확인합니다. 그럴 의사가 없을 경우 결투의 당사자들에게 정해진 룰을 다시 한번 설명해 줍니다. 룰이 명확치 않아 새로운 해석이 필요할 땐 결투를 받아준 쪽에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결투 장소의 지형에 유불리가 있다면 주로 동전던지기로 결정했는데 이건 결투를 신청한 사람에게 우선권이 있었습니다.
준비가 모두 끝나면 이제 결투에 들어갑니다. 세컨드는 결투자를 일정 거리 떨어지게 한 다음 검이 무기일 경우엔 작은 칼을 땅에 꽂는 것으로, 총이 무기일 경우엔 흰 수건을 바닥에 던지는 것으로 시작을 알립니다. 이 신호가 떨어지면 결투는 취소될 수 없습니다.
총의 경우 한 발이 발사될 때마다 세컨드가 양측의 의사를 묻게 됩니다, 결투 신청자가 이걸로 명예가 회복됐다고 선언하면 결투는 아무도 안 죽어도, 아무도 안 다쳐도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결투는 대개 각각 3발을 발사하는 것으로 끝냈습니다. 그 이상은 비신사적인 행위로 치부되었습니다. 결투가 끝나면 즉석에서 치료를 받는 가운데 멋지고 명예로운 결투였다고 서로를 격려하며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한쪽이 죽어도 그의 신사다움을 모두가 함께 치켜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시간대별로 상세히 기록한 다음 결투자와 세컨드 모두가 이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이 문서는 결투 규범을 완벽히 준수했다는 증거로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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