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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 이어 2편까지 이어지는 결투충들의 어리석고 시시콜콜한 결투문화 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결투 방식엔 어떤 게 있었을까?
총으로 하는 결투엔 크게 3가지 방식이 있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동시에 발포하는 것입니다. 서로 등을 대고 각각 10걸음 다음 신호가 떨어지면 동시에 뒤돌아 총을 쏘는 것입니다.
그 못지않게 자주 쓰이는 방식이 번갈아가며 서로 한발씩 총을 쏘는 것입니다. 사전에 합의하거나 결투 장소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누가 먼저 쏠 것인지를 정했습니다. 첫발에 상대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상대에게 기회가 돌아가게 됩니다.
마치 러시안 룰렛 같은 방식도 있습니다.
세컨드가 두 개의 총 중에 한 개에만 총알을 넣어두고 이를 결투할 사람이 고르게 하는 방식입니다.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사격을 했기 때문에 3가지 중 가장 사망률이 높은 방식이었습니다.
결투는 법적으로 허용되었을까?
결투가 오랜 세월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합법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명백한 불법입니다. 가톨릭교회는 결투를 일찌감치 악마의 선동에 의한 범죄라며 이를 금했습니다.
세속의 왕들 역시 대부분의 나라에서 결투를 하는 자는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하지만 결투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유력 가문의 귀족들이었기 때문에 대개는 못 본 척 지나가거나 가벼운 벌금형 정도에 그쳤습니다. 결투에서 상대를 죽였다 하더라도 널리 용인된 절차를 모두 거쳤을 경우 특히 관대한 처분을 받았습니다.
결투의 무기는 왜 칼에서 총으로 바뀌었을까?
결투 무기는 18~9세기가 되면서 대부분 칼에서 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에 관해선 4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신사계급은 무기의 발전단계를 쉽게 따라잡을 위치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총이 비싸기 때문입니다. 즉, 총이 점차 신분을 과시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상류 계급은 평소에도 총을 가지고 다니며 일부러 드러내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셋째는 칼보다 총이 공정한 무기였기 때문입니다. 칼싸움을 잘 하려면 오랜 기간 수련이 필요하지만 총은 초보들이 다르기에 그보단 훨씬 쉬운 무기였습니다.
넷째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 칼보다 총의 치사율이 훨씬 낮기 때문입니다. 칼보단 총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무기인 게 상식이지만 그건 오늘 날의 기준입니다. 당시의 결투용 총은 주로 화승총으로 명중률이 정말 형편없었습니다. 그리고 결투용 총은 사망률을 줄이기 위해 장식에 치중할 뿐 일부러 성능을 떨어뜨려제작했습니다.
반면 칼은 접근 거리에서 휘두르기 때문에 결투자들은 죽거나 심각한 부상을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이게 결투 세계에서 칼이 총으로 대체된 가장 큰 이유입니다.
결투를 하면 반드시 승패가 갈렸을까?
거듭 말하지만 결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예롭고 용기 있는 사람’ 임을 남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체면치레만 된다면 굳이 목숨을 위태롭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첫발을 일부러 빗맞히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면 상대 역시 엉뚱한 곳에 총을 쏘는 것으로 화답했습니다. 이렇게 결투 현장에서 적당히 싸우는 척 하는 것으로 암묵적인 합의를 함으로써 서로 안전하게 명예를 회복하는 길을 선택하곤 했던 것입니다.
결투는 보통 새벽이나 어스름한 저녁에 벌어졌습니다. 결투용 화승총은 습기에 약해 자주 불발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를 하늘의 뜻으로 알고 화해로 결투를 끝내기도 했습니다. 즉, 결투에선 의도적인 무승부가 많았습니다. 러시아의 국민시인인 푸시킨이 20회 이상, 미국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이 무려 100회 이상의 결투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결투는 아무 때나 아무 장소에서나 할 수 있었을까?
결투는 엄밀히 말하면 거의 모든 곳에서 불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목을 피해 보통은 새벽에 했습니다. 아무리 암묵적인 용인이 있었다 해도 대낮에 결투를 한다면 그 자리에서 체포될 수 있었습니다.
결투 장소 역시 사람이 드문 한적한 공터나 강가에서 주로 했습니다. 일요일이나 축제일은 피해야 했고, 교회가 보이는 곳도 금지장소였습니다.
결투 복장은 어땠을까?
정해진 복장은 없었지만 결투할 때 부자들은 실크로 된 상의를 입었습니다. 일반옷의 경우 상처 속으로 천 조각이 파고 들었고, 이게 염증을 일으켜 죽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크는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찢어지기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크옷은 무척 비쌌습니다 상류계급이라고 모두 실크를 살만큼 부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결투를 할 때는 상의를 완전히 벗고 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결투를 대리할 수도 있을까?
성직자나 노인, 청소년, 여성, 환자 등은 결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경우 이들은 결투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내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전문으로 하는 대투사를 챔피언(Champion)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점차 명예롭지 못한 일로 여겨지게 되었고, 오늘 날 챔피언은 우승자를 말하게 되었습니다.
남녀의 결투도 있었을까?
아주 드물지만 남녀의 결투도 있긴 했습니다. 이 경우 남자에겐 핸디캡을 주었습니다. 12세기의 덴마크의 기록에 의하면 남자는 구덩이에 몸을 묻은 채 팔로만 공격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대에서 단 3번 만 몽둥이를 쓸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여성은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중세 독일도 이와 비슷했는데 남자는 한 팔을 사용할 수 있었고, 여자를 구덩이로 끌어들이면 승리였습니다. 그럴 경우 여자는 그 구덩이에 생매장되었습니다. 권총 결투의 경우에는 별 다른 핸디캡이 없었지만 남자가 한 쪽 눈을 가려야 한다는 규칙을 두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자끼리의 결투도 가능할까?
이것 역시 드물었지만 간혹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남자들의 결투와 마찬가지로 여자들의 결투도 총이나 칼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급적 생명에 지장이 없는 무기 사용이 권장되었습니다. 모래를 가득 채운 스타킹이 자주 쓰이던 무기였습니다.
총은 얼마의 거리를 두고 쏘았을까?
세컨드(입회인)의 합의에 따라 발사 거리는 모두 달랐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10야드 이상 떨어져야 한다는 게 당시의 상식이었습니다. 10야드는 9.14m이고, 성인의 한 걸음을 60cm로 잡았을 때 약 15걸음 정도입니다. 하지만 보통은 25~35보 정도 떨어져서 총을 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칼을 사용할 땐 가로 세로 20보 정도의 사각형 안에서 결투를 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번갈아 가며 총을 쏘는 결투는 왜 생긴 걸까?
신호와 함께 동시에 총을 쏘는 결투 방식 못지않게 정해진 순서대로 번갈아 가며 총을 쏘는 결투도 자주 벌어졌습니다. 상대가 자신을 향해 총 쏘길 기다린다는 것은 아무리 총 성능이 떨어진다고 해도 정말 살 떨리는 일일 것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이 두려움을 견디는 것이 자신의 용기를 증명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자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결투하는 사람들은 상대의 총구 앞에서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어야 했습니다.
총을 피하면 어떻게 될까?
상대의 총알을 피한다는 것은 비겁한 행위였습니다. 이런 행동은 결투 당사자들은 물론 결투를 돕는 세컨드 전체가 무척 불명예스러워 했습니다. 화가 난 상대가 총알을 난사해도 비난을 받지 않았습니다. 총을 피하는 순간, 그 사람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테고 평생 비겁자로 살아야 합니다. 사실 당시 총의 명중도가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몸을 피하는 게 딱히 유리하지도 않았습니다.
몸을 움직이다가 오히려 부정확한 총알을 맞을 수도 있으니 총을 피한다다는 건 여러모로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규정과 달리 먼저 총을 쏘면 어떻게 될까?
가끔 공포에 못 이겨 카운트가 끝나기도 전에 먼저 총을 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건 정말 최악입니다. 이럴 경우 세컨드가 반칙을 저지른 자를 쏴 죽일 수도 있습니다. 간혹 이 때문에 세컨드 간의 싸움으로 번져 다수가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근세엔 세컨드의 총기 소지를 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반칙을 범한 자는 나중에 살인죄로 체포돼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상대방이 아닌 하늘을 향해 총을 쏘면 어떻게 될까?
상대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기 싫어 하늘에다 총을 쏠 수도 있습니다. 얼핏 평화로운 행동으로 보이지만 상대는 심한 모욕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명예회복 기회를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공중에 쏜 상대를 정조준해서 사격하는 것은 비신사적인 파렴치한 행위로 몰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신도 빗맞혀야 했습니다.
상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을 때는 별 티가 나지 않게 약간만 비껴 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없는, 명예를 충족하는 결투로 원만하게 끝났습니다.
결투로 인한 사망률은 어느 정도일까?
어떤 방식으로 측정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칼로 결투할 경우 사망률이 20%에서 많게는 60%까지 잡기도 합니다. 즉사하지 않더라도, 감염이나 패혈증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권총으로 결투할 경우에는 사망률이 뚝 떨어져 6.5%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결투로 죽은 사람이 전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17세기 초 프랑스에서만 매년 200명 이상이 결투하다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숫자만 봐도 당시 유럽에서 결투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투는 어떻게 사라졌을까?
서구의 결투 문화는 19세기를 시작으로 20세기 초에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 이유로는 우선 결투가 더 이상 정의롭지 못하다는 인식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점점 더 사람들은 명예보단 이기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총의 성능이 개선될수록 결투로 목숨을 잃을 위험성도 높아진 점이 분명 한 몫 했을 것입니다.
먼저 총을 쏘거나 칼로 찌르는 반칙이 난무하자 “신이 정의로운 사람에게 승리를 가져다준다.” 는 믿음이 아무 쓸모짝이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독일을 시작으로 명예훼손죄와 모욕죄가 속속 도입되면서 더 이상 결투로 승부를 가릴 이유도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신흥 상류 계급인 부르주아지에겐 명예보단 사업적인 안정성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사적인 결투가 국가의 사법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되면서 처벌도 점점 더 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초 들어선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 연달아 터졌습니다.
전쟁 중에 결투는 터무니없는 짓이었습니다. 그럴 겨를도 없었고, 수많은 사람이 전쟁 중 목숨을 잃으면서 생명의 소중한 가치도 점점 더 넓게 인식되어 갔습니다. 이렇게 되어 그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던 결투는 현실 세계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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