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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걱정하지 마세요. 한국은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영웅들이 모인 군대가 지금 가고 있답니다."
1951년 5월, 한 무리의 군인들을 싣고 인도양을 지나던 한 군함에선 이런 노래가 수시로 들려왔습니다. 이들은 외국이 처음이었습니다. 내륙국에 사는지라 바다도 처음이었습니다. 당연히 배 멀리가 극심했습니다. 전쟁에 대한 공포심도 수시로 밀려왔습니다. 이럴 때마다 이들은 마치 주문처럼 '한국은 걱정하지 마세요. 한국은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영웅들이 모인 군대가 지금 가고 있답니다." 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들은 한국의 6.25전쟁에 파병된 에티오피아 군인들이었습니다.
지식이라기 보단 우리 모두가 가슴으로 기억해야 할, 모든 면에서 특별했던 에티오피아의 '각뉴 부대'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사실 에티오피아는 한국 전쟁 전까지는 우리와 아무런 관련도, 인연도 없는 나라였습니다. 이런 에티오피아가 무슨 이유로 그 먼 한국까지 전투 부대를 보내게 되었는지 그 이유부터 알아보겠습니다.
물론, 단지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지요. 모두 알다시피 국제사회는 이런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선의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포장된 명분 뒤에는 자국의 이익이 감춰져 있는 게 냉혹한 현실입니다. 에티오피아도 물론 그랬습니다. 정확한 상황을 알려면 당시의 에티오피아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1935년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해 왔습니다.
에티오피아군은 용감히 맞서 싸웠으나 이탈리아의 신식무기를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겨자 독가스 등으로 27만 명이나 죽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세라시에(Haile Selassie)황제는 1차 대전 후 결성된 국제연맹에 이 부당성을 호소했습니다. 세계 전쟁의 재발을 막기 위해 국제연맹이 가장 앞세웠던 게 '집단 안보' 였습니다.
이 결성 목적에 걸맞게 전세계가 무솔리니에 집단으로 맞서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지만, 불행히도 귀 기울여 주는 나라는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결국 셀라시에 황제는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나라 없는 설움을 5년이나 견딘 끝에 황제는 1941년에야 이탈리아를 몰아내고 자리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끈질긴 독립 운동과 영국의 도움 덕이었습니다. 그리고 9년이 지난 1950년 한국에서 6.25 전쟁이 터졌습니다. 국제연맹이 해체되고, 2차 대전 후 새로 결성된 국제연합(UN)은 미국의 주도로 즉각 UN 최초의 연합군을 한국에 투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를 처음부터 적극 지지하고 나선게 셀라시에 황제입니다. 그동안 일관적으로 표명했던 국제적인 집단 안보 체제를 한국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실행에 나선 전투부대 파견을 결성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에티오피아는 한국에 군대를 보낼 정도로 국내 사정이 여유롭진 않았습니다. 독립한지 얼마 안 된지라 부족 간의 갈등도 여전했고, 변변한 군대조차 없었습니다. 군대라곤 사실상 스웨덴 군이 훈련 시켜준 황실 근위대뿐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아프리카에선 제법 영향력이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지만 국제 기준으론 명백히 빈곤국가 중 하나였습니다. 그럼에도 황제는 한국으로의 파병을 밀어붙였습니다. 믿었던 국제연맹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그 결과 나라를 빼앗긴 뼈아픈 경험을 황제는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국가 안보엔 무엇보다 국제 협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한국 파병으로 에티오피아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보해 놓으면 국가 안전을 지키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또한 황제는 한국 전쟁이 에티오피아를 지킬 강한 군대를 양성할 절호의 기회라고 보았습니다. 파병은 국가 위상도 높이고, 군대가 전투 경험도 쌓을, 일석이조의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에티오피아군은 실제로 1년 마다 파병 부대를 교체해 두루두루 실전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게다가 미국이 지급해 줄 최신형 무기로 군대를 무장할 수 있다는 점도 큰 매력이었습니다. 나중에 에티오피아 군은 전투에서 사용하던 대부분의 무기를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기 값으로 단 4만2천달러만 지불했습니다. 거의 거저 얻은 셈입니다. 셀라시에는 굉장히 영민했던 황제인 모양입니다. 그는 한국 파병을 통해 또 다른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지배에서 함께 벗어난 에리트레아를 합병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와 국격을 맞대고 있는 이웃나라로 홍해를 긴 해안선으로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륙국인 에티오피아가 이전부터 군침을 삼키던 곳이었습니다. 황제는 이 문제에 대해선 세계 최강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지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6.25 전쟁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고 나선 것입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는 이 대목에서 여타 연합군과는 명백히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유럽은 나토(NATO)확장을, 아시아 국가들은 경제 원조를 미국으로부터 약속 받았습니다. 반면 에티오피아는 참전이 가져올 여러 효과를 예측하거나 희망했을 뿐 그 어떤 확약도 없이 파병을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황제는 파병에 정말 진심이었습니다. 황제는 8월부터 파병 준비에 나서 우선 자신의 근위병 중에서 최정예로 1200여 명을 선발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산이 많다는 점을 파악하고, 이 정예병들을 에티오피아의 고지로 보냈습니다. 이곳에서 무려 8달이나 영국군 교관으로부터 매복, 순찰, 산악 전투 훈련을 받게 했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다음 마침내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황제 궁전 앞에서 출정식을 가졌습니다. 황제는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게 불가능하다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 고 명령을 내린 후 각뉴 부대(강뉴, Kagnew Battalion)라는 이름을 하사했습니다. 에티오피아어로 "혼돈에서 질서를" 이라는 뜻입니다. 마침내 각뉴 부대는 기차를 타고 지부티로 이동한 다음 그곳 항구에 대기 중인 미군함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3주간의 긴 항애 끝에 1951년 5월 6일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한국에 온 에티오피아 장병들은 첫날부터 여러모로 색달랐습니다. 우선 미국은 이들에게 새로운 군복과 최신식 무기를 지급했습니다. 문제는 자신들이 다루던 구식 무기와는 너무 달라 그 사용법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뉴 부대는 대구의 UN 캠프에서 다시 8주 동안 무기 사용법을 따로 익혀야 했습니다. 이러니 이들의 전투력에 의구심이 드는 게 당연했습니다. 더구나 미군 전술에 대한 이해도도 알 수 없었고, 언어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연합군 사령부는 에티오피아 군에게 후바의 치안과 보급을 맡기려 했습니다. 하지만 각뉴 부대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자신들은 싸우러 온거지 후방에서 쉬려고 온 게 아니란 것입니다.
미군과 함께 최전선에서 싸우겠다는 이들의 고집에 연합군 사령부는 할 수 없이 전투가 가장 치열한 강원도의 철원 화천 양구의 중동부전선으로 보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렵게 군대를 꾸리느라 다른 연합군에 비해 1년 늦게 합류한 각뉴 부대는 첫 전투부터 눈부셨습니다. 전체 전황은 소강 상태였지만 강원도 일대에선 치열한 고지전으로 수많은 사상자들을 낼 때였습니다. 각뉴 부대는 8월 12일 철원과 화천 경계의 적근산 일대를 정찰하라는 첫 임무를 맡았습니다.
도중 중공군과 맞닥뜨렸는데 무려 15대 300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4시간을 교전한 끝에 30명 이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4명이 전사하고, 대다수가 부상당한 이 치열한 전투 하나로 에티오피아 병사들을 은근 무사하던 연합군의 의식은 단박에 바뀌었습니다. 이후 각뉴 부대는 모든 전투에서 전설을 써 내려갔습니다. 각뉴 부대는 총 6,037명의 병력이 총 253회의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 결과, 수비를 하든, 공격을 하든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253전 253승. 국방부가 발간한 한국전쟁사의 전례 없는 공식기록입니다.
이런 탁월한 성과로 각뉴 부대는 매년 교체된 3개의 전투 부대 모두가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단 한명의 포로는 커녕 단 1구의 전사자도 전쟁터에 남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전후 포로교환식에서 16개 전체 전투부대 파견국에서 유일하게 대상자가 없는 나라가 에티오피아였습니다. 각뉴 부대는 포로로 잡힐 바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각오를 매일 다지면서 전투에 참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사자가 생겼을 경우 이를 회수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각뉴 부대는 북한군과 중공군에게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들이 귀신이거나 식인종이라는 소문까지 퍼졌습니다. 군 전체가 모두 흑인으로 이루어진 이런 부대는 처음 보았을 것이라 공포심이 더 컷을 것입니다. 이를 없애기 위해 중공군은 생포는 물론 시신 확보에까지 진급과 포상금을 내걸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특히 에티오피아 군은 야간 이동과 야간 정찰, 그리고 백병정에서 정말 탁월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복에 걸리더라도 손쉽게 그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이 소속된 미 7사단의 정찰임무는 단골로 각뉴 부대가 맡았고, 그 덕에 미 7사단도 많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막강 전투부대도 견디기 힘든 게 딱 하나 있었으니 바로 한국의 추위였습니다.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은 한 결 같이 인터뷰를 통해 "전투보다 힘든 게 영하 30도가 넘는 추위" 라며 "한국보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나라는 결코 없을 것" 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에티오피아 군에 대한 전쟁기록을 보면 비전투 손실이 76명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숫자는 대부분 추위와 관계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눈 속에 매복한 적으로 인한 희생도 적지 않았습니다. 에티오피아 군은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니라 마음도 따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부대 안에 보화원이라는 이름의 고아원을 두고 전쟁고아들을 보살폈습니다. 식량 사정이 좋지않던 시기라 각뉴 부대원들은 자신들의 식사량을 줄여 고아들과 음식을 나눴습니다.
그렇게 해도 수십 명의 고아들을 먹이는 게 쉽지 않자 에티오피아 병사들은 월급을 조금씩 떼어 모았습니다. 보화원은 이들이 본국으로 철수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각뉴 부내는 휴전 후 평화유지 활동까지 한 후 1956년 3월 모든 임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귀환했습니다. 536명이 당했고, 121명의 고귀한 목숨이 한국의 자유를 지키는 데 바쳐졌습니다.
에티오피아로 돌아간 병사들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셀라시에 황제는 수도인 아디스아바바 인근에 '한국촌(Korea Village)' 이라는 이름의 마을과 학교를 지어 그곳에서 살도록 했고, 연금도 지급했습니다. 그리고 황제는 1968년 5월에 직접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춘천의 공지천에 마련된 에티오피아 참전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머물던 자리엔 에티오피아를 알리는 문화관 겸 커피집이 들어섰습니다.
이에 황제는 에티오피아 집(벳)이라고 쓴 친필 휘호를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외교행낭으로 커피 원두도 보내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 최초의 원두 거피집이 춘천에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7년간의 극심한 가뭄으로 경제가 피폐하게 되었고, 그 결과 1974년엔 공산 정권이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살라시에 황제는 피살되었습니다.
파병 군인들은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웠다는 이유로 몇 명은 목숨을 잃었고, 연금과 재산도 빼앗겼습니다. 참전 용사들은 훈장을 헐값에 내다 팔아야 할 정도로 아주 궁핍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다시 정권이 교체된 1991년이 되어서야 우리 정부는 이들에 대한 지원에 나섰습니다. 이제 참전용사들의 평균 나이는 90대가 되었고, 아직 100여 명이 생존해 있습니다.
우리 정부와 민간에선 염금도 지급하고, 병원을 지어 무료로 치료도 해주고, 그 후손들에게 직업 교육과 한국유학도 후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보상도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갈음하진 못할 것입니다. 사실 그들의 국명은 우리의 외국어 표기법에 따라 에티오피아라 하지만 현지 발음은 이디오피아에 가깝다고 합니다. 대사관에서도 그렇게 불러주길 바랍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들이 원하는 국명으로 불러 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디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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