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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혁명을 일으킨 쿠텐베르크의 인쇄기로 돈을 번 사람은 누구일까?
이 블로그는 무려 118개국에서 보고 있습니다. 한글로 되어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아프리카의 남수단이나 부르키나파소, 심지어 내전 중인 시리아에서도 누군가 이 블로그 글을 보고 있다고 구글에서 알려오고 있습니다. 물론 그 속내를 알 길이 없는 알고리즘의 안내 덕이겠지요.
어쨌든 순식간에 정보가 지구 전체로 흐르는 이 명백한 증거를 볼 때마다 이 어머어마한 속도감과 확장성에 늘 놀라게 됩니다. 이런 정보통신혁명을 두고 많은 분들이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을 떠 올리실 겁니다.
하지만 역사를 전공한 저 같은 사람은 습관적으로 더 먼 과거를 되돌아보며, 누가 원조인지를 찾아보게 됩니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라는 인물입니다.
세계 4대 발명품 중 하나인 인쇄기를 만든 사람, 타임지가 선정한 지난 ‘1,000년의 인물’이라는 오늘날의 유명세와 달리 구텐베르크는 평생 참 안 풀리는 인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살아생전 초상화 하나 없을 정도로 정말 조금도 중요치 않은 인물이었지요. 심지어 언제 태어났는지조차 분명치 않았습니다. 어쨌든 구텐베르크는 1400년경 독일 마인츠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대주교 산하의 조폐국에서 일하던 하급 관리였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구텐베르크도 금속 세공 기술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게 나중에 금속 활판 인쇄기를 만드는 발판이 됩니다.
30대 중반에는 지금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약 10년 간 살았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돈을 빌려 첫 사업을 시작합니다. 금속 거울을 만들어 순례자들에게 판 것입니다. 당시 북쪽의 작은 도시 아헨 대성당의 성물을 보러 가는 순례자들이 많았는데 거울을 통해서만 ‘거룩한 빛’을 볼 수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흑사병이 다시 심해졌고, 게다가 큰 홍수까지 겹쳐 순례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당연히 사업은 쫄딱 망했습니다. 얼만 되지 않은 유산이 바닥났습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는 이 와중에도 남 몰래 인쇄기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개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철저히 혼자였습니다. 마침내 완성되자 구텐베르크는 1448년 다시 고향인 마인츠로 돌아와 인쇄소를 차렸습니다. 드디어 1450년 경 첫 출판물이 나왔습니다. 거대한 역사의 변화를 가져온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치곤 소박하게도 ‘도나투스(Donatus)’라는 아주 간단한 라틴어의 문법책이었습니다.
당시 대학의 모든 강의는 라딘어로 이루어졌습니다. 때문에 라틴어 문법책은 특히 학생들에게 꼭 필요했습니다. 필사본에 비해 파격적으로 싼 가격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두 번째 출판물은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주었습니다. 그건 ‘면죄부’였습니다. 면죄부는 교회가 돈을 받고 파는 증서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고급스러워 보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구텐베르크가 찍어낸 면죄부의 품질은 성직자들을 대만족시켰습니다. 면죄부는 한 번 산다고 평생 죄사함을 받는 게 아닙니다. 3개월권, 6개월권, 2년권등으로 유효기간이 다양하기 때문에 면죄부 인쇄 수요는 늘 무궁무진했습니다.
교회입장에서도 구텐베르크가 빨리 찍어낼수록, 사진들의 수입도 늘었기 때문에 서로 Win Win이었습니다.
면죄부 판매로 더욱 자신감을 얻게 되자 이번엔 공교롭게도 성경 출판에 도전했습니다. 그간 앏은 책자를 통해 인쇄 기술을 계속 시험해왔던 구텐베르크는 이제 두꺼운 책을 찍어 내도 될 만큼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 성경은 오늘날 구텐베르크의 명성을 가져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걸작품이었습니다. 나중에 교황이 되는 비오 2세가 다른 추기경들에게 구텐베르크의 성경을 추천하면서 “활자가 너무 깔끔해서 안경 없이도 읽을 수 있다”고 극찬할 정도였습니다. 이제 부자가 되는 일만 남은 듯 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론 구텐베르크는 이 성경 때문에 망했습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거울을 파는 것보다 더 처절하게 망해 말년까지 비참할 지경이었습니다. 이 얘긴 뒤에서 다시 하기로 하고 우선 왜 구텐베르크가 인쇄기 개발에 몰두했는지부터 알아봅니다.
사실 구텐베르크 말고도 인쇄기를 만들고 싶은 사람은 많았습니다. 큰돈이 될 거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텐베르크가 활동하던 1400년대는 중세가 끝나고 세계 곳곳에서 대학들이 속속 들어서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책은 너무 비싸고 귀했습니다. 1209년에 설립된 영국의 게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엔 200년이 지난 1400년대 초에도 책이 고작 다 합쳐봐야 122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절대 훔쳐 가지 못하도록 책을 쇠사슬로 묶어 두었습니다. 그럴만도 한것이 책 한권을 필사하려면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펜으로 양피지에 옮겨 적는데 하루에 3천 단어가 물리적인 한계라고 합니다. 그러니 지 아무리 얇아도 한 달, 웬만한 두께면 꼬박 다섯 달은 잡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책 한 권은 집 한 채 값이라는 게 기본 등식이었습니다.
이러니 책은 만들기만 하면 팔 수 있는, 그리고 얼마든지 비싸게 팔 수 있는 고부가가치 사업이었습니다. 성경은 더더욱이나 비쌌습니다. 성경 전권을 필사하려면 1~3년이 걸렸습니다. 가격은 무려 집 열채 값이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은 교회나 수도원에서만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개인이 성경을 갖는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구텐베르크가 면죄부로 인쇄 연습을 한 다음 곧바로 성경 출판에 들어간 것입니다.
구텐베르크는 180권의 성경을 만들어 단 30길더(guilder)씩에 팔았습니다. 30길더가 어느 정도의 가치냐하면 일반 사제들의 3년 치 봉급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도 어마어마한 가격이지만 집 열채 값에 비하면 당시로선 파격적인 헐값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당시 귀족들도 자신의 부와 신앙을 과시하기 위한 소장품으로 ‘구텐베르크 성경’을 사기 위해 줄을 섰습니다. 그럼에도 구텐베르크는 망했습니다. 과도한 빚 때문입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모든 재산을 날리고 마인츠로 돌아온 구텐베르크는 인쇄소를 차리기 위해 요한 푸스트라는 대부업자에게 800길더를 빌렸습니다. 사제의 80년치 월급이자, 상당히 넓은 농장을 살 수 있을 정도의 큰돈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성경 인쇄에 들어가면서 800길더를 더 빌렸습니다. 푸스트는 두 번째 대출을 해주면서 자신을 동업자로 인정할 것과 5년 내에 대출금을 모두 갚을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성경 인쇄가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가던 순간, 푸스트는 구텐베르크가 횡령을 했다며 즉각적인 전액 상환을 요구했습니다. 구텐베르크는 재판에서 졌습니다. 인쇄기와 인쇄소도 모두 푸스트에게 빼앗겼습니다. 특허도 저작권도 없던 시기이니 속수무책이었습니다. 60정도의 나이에 인쇄소에서 쫓겨난 구텐베르크는 얼마 후 실명까지 와서 더 이상 재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마인츠 대주교의 도움으로 근근이 살다가 1468년 쓸쓸히 생을 마쳤습니다. 죽은 후에도 그의 운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묻힌 마인츠의 프란체스코 교회가 2차 대전 때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구텐베르크의 묘도 사라졌습니다.
그럼 돈은 황금알을 낳는 거의를 갖게 된 푸스트가 벌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도 그리 오래지 않아 흑사병으로 죽었습니다. 최후의 승자는 구텐베르크의 견습공 출신인 피터 쉐퍼(Peter Schoffer)입니다. 인쇄소 최고의 기술자이기도 했던 그는 재판에서 구텐베르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면서 나중에 푸스트의 사업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푸스트의 딸과 결혼하면서 인쇄소를 독차지했습니다. 구텐베르크가 응당 가져가야 할 부와 명예가 모든 그의 차지가 된 것이죠. 나중엔 그의 자식들도 모두 다른 도시에서 인쇄소를 차려 최초의 영어 성경을 이 집안에서 펴내기도 했습니다.
씁쓸하게도 역사는 그러거나 말거나 구텐베르크라는 인물이 아닌, 구텐베르크가 만든 인쇄기가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얼마 후 구텐베르크가 키워낸 기술자들이 유럽 각국으로 흩어져 인쇄소를 차렸습니다. 구텐베르크가 성서를 인쇄한 지 50년도 채 되지 않아 유럽의 200개 이상의 도시와 마을에 1,000개가 넘는 인쇄소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미친 듯이 책을 찍어내 이 기간 동안 무려 900만 권의 책을 출판해 내었습니다.
구텐베르크 이전까지 유럽에 있던 책을 모두 합쳐봐야 3만 권 정도가 고작이었으니 실로 엄청난 양입니다. 책 출간은 점점 더 늘어나 16세기에는 2억 권, 17세기에는 5억 권, 18세기에는 10억 권 이상이나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지식과 정보의 대폭발이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이렇게 해서 짧게는 문맹퇴치와 종교개혁을, 장기적으론 이후의 모든 지식혁명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중 간과되기쉬운 게 과학 발전에 대한 지대한 공헌입니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던 유럽의 과학자들은 인쇄술 덕분에 비로소 다른 과학자들이 연구로 밝혀 낸 원본 데이터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에 정확하게 인쇄된 도표와 차트, 그리고 공식 덕에 과학자들은 번거로운 기초 계산을 다시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죠. 이 덕에 과학자들은 보다 더 진전된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도 구텐베르크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중세 유럽인들은 대부분 고립된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외지 소식이 거의 유일한 창구는 가톨릭 사제들뿐이었습니다. 말로 전해지는 정보의 신뢰성이라고는 기껏해야 하나님에 대한 맹세가 고작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중세 1천 년을 보내왔습니다.
그러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로 시작된 책의 출간은 오늘날 인터넷 세계가 펼치고 있는 ‘정보 혁명’과 가히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체감속도는 이 블로그가 118개국으로 순식간에 전파되는 것보다도 분명 더 훨씬 빠르다고 느껴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구텐베르크하면 금속활자만을 상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뿐 아니라 잉크와 종이, 인쇄면에 힘을 고르게 가하는 압출기(Press)등 토탈 패키지입니다. 오늘날 언론을 프레스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구텐베르크의 압축기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마지막 사족입니다. 구텐베르크 성경은 1987년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 나왔습니다. 낙찰가가 540만 달러(약 60억 원)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온다면 무려 3천5백만 달러(약 400억 원)이상일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습니다. 부질없지만 평생 빚에 쫒기며 살던 구텐베르크가 이 액수를 들으면 무슨 기분일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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