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바야돌리드 논쟁’ 역사에서 보는 인간의 야만성

1550년 스페인 왕의 별장이 있는 바야돌리드에서 아주 이상한 회의가 열렸습니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최악의 인종 논쟁이었습니다. 이 회의를 개최한 스페인 왕실과 교황청은 무척 진지했습니다. 하지만 이 회의에 대해 누구보다 진지해야 할 사람들은 아메리카 신대륙의 원주민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목숨이 이 회의 하나에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이런 회의가 있었는지 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이 회의의 주제는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오들은 과연 인간인가, 아니면 동물인가”였습니다.

콜럼버스 이후 많은 스페인 탐험가들이 속속 아메리카 대륙에 닿았습니다. 스페인 사람들과 인디오들의 첫 대면은 양쪽 모두 두려움과 호기심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일부 스페인 탐험가들에게 신대륙은 낙원일지도 모른다는 환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디오들의 몸에 날개가 있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하지만 두려움과 호기심이 만들어낸 존중과 평화의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한 군인이 인디오 여성을 겁탈했습니다. 곧 임신이 되는 것을 보고 스페인 탐험가들은 인디오들이 최소한 천사는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이후 이들의 행동은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탐험가가 아니라 정복자가 된 것입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식민 통치는 유독 가혹했습니다. 이들이 가져온 천연두에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인디오들은 죽는 것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코르테스는 멕시코를 정복한 후 인디오들의 얼굴에 노예임을 표시하는 불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불도장이 얼굴에 새겨졌습니다. 나중에는 불도장이 너무 찍혀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된 인디오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들은 노예로 삼은 원주민들을 때론 재미삼아 13명씩 꼬챙이로 꿰어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열두 사도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열세 명씩 짝을 지은 것입니다. 스페인 인들에게 신대륙은 하느님의 선물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비롭게도 이 땅을 개발할 수 있도록 인디오라는 공짜 노동력까지 함께 선물하셨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인디오들을 동물처럼 학대하는 데 조금도 거리낄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왕실과 로마 교황청의 입장은 조금 달랐습니다. 스페인은 이슬람을 몰아내고 통일을 이룬 뒤 아주 잘 나가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카를 5세 때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며 카톨릭의 수호자로 나섰습니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 어울리지도 않는 카를5세 궁전을 세웠다고 오늘날의 여행자들에게 늘 욕을 먹는 그 왕입니다.

 

당시 유럽에선 스페인 사람들은 “잔인한 놈들”이라는 등식이 있었습니다. 이게 소위 ‘검은 전설’입니다. 무자비한 반란 진압과 악명 높은 종교 재판은 다른 유럽인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스페인 정복자들의 악행이 ‘검은 전설’을 더 키우고 있었습니다.

 

새로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어 전 유럽을 리드해야할 위치가 된 스페인 왕실로선 이게 꽤나 난처한 일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론 인디오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면서 신대륙을 유지해 줄 노동력의 부족문제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스페인 왕실과 로마 교황청이 이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인 것은 당시의 종교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분명 이슬람을 유럽에서 몰아내고,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하느님이 내린 상이자 축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종교개혁이 일어나 독일과 동북유럽의 교회들이 이탈하고, 영국마저 성공회로 등을 돌린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로마 교황청은 좀 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에서 로마 카톨릭의 위세가 줄어드는 만큼 신대륙에서 새로운 신자를 늘려야 한다는 위기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의 카를5세와 로마 교황청이 바야톨리드에서 회의를 소집한 것입니다. 인디오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를 두고 교계 전체가 입장을 정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인디오들이 인간인지 아닌지를 먼저 판별하는 게 중요했을까요?

그건 만약 인디오들이 인간이라면 이들도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그들을 무조건 노예로 삼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임금도 지불해야 하고, 인내심을 갖고 포교해야 할 대상으로 신분이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인디오가 인간이 아니라면 마음껏 노예로 부려 먹고, 학대를 해도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어처구니없지만 당시는 정말 그랬습니다.

 

신대륙을 총치하던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당연히 인디오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들을 대표해서 당대 최고의 석학 중 한명인 세풀베다(Juan Ginesde Sepulveda)가 논쟁에 나섰습니다. 다행히 인디오들도 자신들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주로 현장에서 참상을 목격한 수도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대표해 신대륙에서 오랫동안 인디오들의 인권에 헌신해 온 도미니크회의 신부인 라스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가 나섰습니다. 그리고 로마교황을 대리하는 추기경과 15명으로 구성된 성직자와 법학자들이 이 논쟁의 판정단 역할을 맡았습니다. 인디오들의 운명을 좌우할 이 치열한 회의는 1년 이상 계속되었고, 이를 ‘바야돌리드 논쟁’이라고 합니다.

세풀베다는 “인디오들은 인신공양을 하고, 인육을 먹으며, 문자도 없고, 자신의 문화를 보여줄 변변한 건축물도 없으며, 뚜렷한 종교가 없다는 점”을 들며 이들이 이간이 아니거나 다른 문명인의 지배를 받도록 태어난 열등한 인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오랫동안 유럽 귀족들의 사고를 지배해오고 있었습니다. 이를 요약하면, “천지가 창조될 때부터 인류는 문명인과 미개인으로 등급이 나눠져 있으며, 복종하기 위해 태어난 미개인들은 태생적인 노예들”이란 것입니다.

 

신대륙에 인디오들이 있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태생적 노예들이 수천 년간 진정한 주인이 오길 기다리며,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회의 과정은 약간의 픽션을 가미한 ‘바야돌리드 논쟁(장 클로드 카리에르 저, 샘터사 출판)이란 책에 리얼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인디오를 변호하는 라스카사스 신부에게 퍼부어진 첫번째 질문은 “과연 인디오들에게도 지능이란 것이 있느냐”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이들에게도 감정이나 감성 같은 게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인디오들을 원숭이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인디오가 인간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 중 압권은 멕시코에서 4명의 인디오를 직접 운송해와 이 회의에 내세운 장면입니다. 판정단은 이들의 냄새를 맡아보거나, 피부를 당겨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왜 자신들과 달리 수염이 적은가, 스페인 남자와 관계하면 임신을 할 수 있는가, 그런 결합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금방 죽지 않고 정상적으로 잘 자라는가.” 등을 묻습니다.

 

이는 이들이 원숭이라면 스페인 남자와 관계해도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뜻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급기야는 인디오 엄마의 아이를 빼앗아 칼로 찌르려는 동작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아이의 엄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알아보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5명의 위원들이 최종 판정을 내놓았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많은 정황들이 인디오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듯 보였지만 15명의 위원들은 “인디오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인디오들을 더 이상 노예 취급해선 안 된다”는 교시를 신대륙의 모든 교구에 내렸습니다. “조속한 시일 내에 이들에게 선교할 것”도 잊지 않고 당부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디오들에 대한 가혹행위는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그 덕에 인디오들의 인구 감소도 멈추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이렇게 비극의 막이 내리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비극의 막이 새로이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건 악을 거악으로 덮는, 또 다른 무지와 편협함으로 가득한 인류 최악의 범죄였습니다. 인디오들을 더 이상 함부로 노예로 쓸 수 없게 된 신대륙의 스페인 귀족들이 강력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실제로 신대륙 경제가 위축되면서 스페인 왕실과 교황청의 수입도 줄어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신대륙을 지배하던 귀족들이 본국에서 독립할까봐 두려웠습니다. 이에 또 다른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인디오들보다 더 동물같고, 인디오들보다 더 튼튼한 흑인을 노예로 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아프리카에선 노예사냥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수천만 명의 흑인을 그 험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보내는, 본격적인 노예무역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인디오들이 몰랐던 것처럼 흑인들도 바야돌리드의 논쟁에서 이 모든 것들이 비롯되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인디오들과는 달리 흑인 노예들에겐 ‘바야돌리드의 논쟁’ 같은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