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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치엔 "못살겠다. 갈아보자" 같은 게 없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오직 자민당만을 지지할 뿐입니다. 일본의 자민당은 1955년 창당되었습니다. 이후 올해까지 약 4년을 제외하고, 61년간을 집권해왔습니다. 일본의 이런 정치 상황을 볼때마다 "일본은 정말 민주국가가 맞나?" 라는 의심도 슬쩍 듭니다. 실제로 수십 년간 일당이 지배하는 국가는 중국과 북한 공산당을 제외하곤 세게적으로 일본밖에 없습니다.
우리만 일본의 민주주의를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미국의 비교정치학자인 펨펠(T. J. Pempel)은 '현대 일본의 체제 이행' 이라는 저서에서 일본의 일당 지배를 '희한한(uncommon)민주주의' 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영국의 경제 전문지인 이코노미스트(The Ecomonist)가 매년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수에서 일본은 2020년에 세계 26위로 '결함 있는 민주국가' 로 분류되었습니다. 우리는 23위로 '완전한 민주국가' 입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부정투표 논란이 있어 본적은 없습니다. 국민의 자발적인 선택일 뿐입니다.
그래서 일본 자민당은 장기 집권을 꿈꾸는 각 나라 정당들의 롤 모델입니다. 그 덕에 일본인들이 왜 줄기차게 자민당만을 지지하는지에 관해선 많은 연구 결과들이 있습니다. 다만 복잡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해가 쉽도록 최대한 단순하게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가장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인 일본의 파벌 정치 얘기부터 해보겠습니다.
선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파벌 정치는 자민당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꼽힙니다. 자민당은 자유당과 민주당이라는 보수적인 두 파벌이 합쳐져 만들어졌습니다. 1994년의 뉴욕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사회주의 정당의 득세를 걱정한 미국 CIA가 압력을 행사하고, 정치 자금도 댔다고 합니다. 어쨌든 태생부터가 철학이나 이념이 아닌 파벌의 결합입니다.
이후 자민당 안에 수많은 파벌들이 흥망성쇠하면서 그 보스들의 합의로 총리를 만들어왔습니다.
보통 정치에서 파벌이라면 당이 갈라질 정도의 갈등을 연상하기 쉽지만 일본의 파벌정치는 매우 교묘하게 작동됩니다. 1972년 중국과의 수교 과정을 보면 그 작동방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의 분위기는 온통 반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핑퐁외교를 펼치다 미중 수교를 맺었습니다. 일본도 태세전환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면 보스들의 합의로 한 파벌이 친중을 내세웁니다. 그리고 그 파벌의 보스가 새 총리를 맡게 되죠. 우리가 봤을 땐 정당 내의 권력 교체에 불과하지만 일본인들은 이걸 정권 교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민당은 국민건강보험, 국민연금, 최저임금, 환경 규제 등을 일본에 도입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극우 정치인으로 꼽는 아베조차 기업을 압박해 임금을 인상하도록 하는 친노동 정책을 펼쳤습니다. 정권 유지에 필요하다면 죄파 정권이나 할 법한 진보 정책을 추진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럴 때마다 당의 얼굴인 총리는 계속 바뀌었습니다.
일본 스타일의 정권 교체를 한 것이죠. 일본에 1년도 안 되는 단명 총리가 유독 많은 이유가 이것입니다. 일부에선 이를 '창조적인 보수주의' 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일본의 자민당은 "온리인 쇼핑몰인 아마존과 같은 존재" 라고 분석합니다. "원하는 모든 걸 살 수 있으니 굳이 다른 야당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다" 는 것입니다.
파벌의 수장은 겨울엔 떡값, 여름엔 얼음값을 돌리며 소속 의원들을 권리하느라 여기서 정경유착에 따른 부패가 발생하곤 합니다.
그럼에도 파벌 간의 견제와 균형, 분배가 여전히 자민당에선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일본만의 독특한 사고방식과 문화도 자민당의 독식에 굉장히 유리한 환경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세습 정치입니다.
우리와 달리 일본인들은 세습 정치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없습니다. 자민당 의원의 40% 정도가 세습입니다. 전 총리인 아베 신조만 해도 3대에 걸친 정치 가문 출신입니다. 오랫동안 일본인들은 "각자에게 정해진 일을 하는 것이 세상의 질서" 라는 와 사상에 길들여진 삶을 살아왔습니다. 때문에 일보인들은 변화보단 현상을 유지하는 것에 본능적인 안도감을 갖습니다. 이들에게 익숙한 정치 질서는 자민당의 집권입니다.
이런 현상은 보수 성향이 강한 시골로 갈수록 더 심합니다.
이들에 의해 정치 가문이 내세우는 세습의원들의 당선율은 무려 80%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일본의 자민당 장기집권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소선거구제라는 투표제도도 자민당에 절대 유리합니다. 야권은 사분오열되었기 때문에 한명만 당선되는 소선거구제에선 자민당 공천자가 당선될 확률이 높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상대적으로 높은 자영업 비중도 자민당에 유리합니다.
자그마한 경제 환경 변화에도 자영업자들은 도산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어느 나라건 자영업자들은 대개 변화보단 안정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본의 자영업 비중은 16%정도고, 우리나라는 30%가 넘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이 모든 사유들은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건 경제입니다.
이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간단한 문제입니다. 경제가 좋으면 정권이 유지되고, 경제가 나빠지면 정권이 교체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오랜 역사를 통틀어 경제가 좋을 땐 대통령이 연임되고, 나쁠 땐 연임에 실패했습니다. 일본은 2차 대전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소련이 양분하는 냉전시대 덕에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어왔습니다.
미국 덕에 안보 비용을 경제 개발에 사용할 수 있었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으로 전쟁 특수를 누리면서 10%대의 초고속 성장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의 거품경제를 타고 세계 2위라는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정권이 바뀔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일본의 경제 거품은 꺼졌습니다. 여전히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지만 모든 지표가 일본의 경제 수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2000년대에도 자민당이 계속 지지 받는 이유를 알아보는 게 일본의 정치를 이해하는 핵심 포인트입니다.
1990년부터 시작된 소위 '잃어버린 20년' 의 장기 불황, 즉 일본의 경제가 나빠지자 일본 국민들 역시 야당인 민주당으로 2009년에 정권을 교체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엉망이었습니다. 사실 민주당은 거의 모든 주요 공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을 약속했다가 보수 언론에게 '반미'라고 융단 폭격을 당했고, 관료 정치를 개혁하려다 공무원들의 태업을 겪었습니다.
게다가 기득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소득세 대신, 국민 모두가 부담해야 하는 소비세를 인상하려다 지지층까지 모두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토목 건설도, 신자유주의 경제 청책도 제대로 끊어내지 못했으니 민주당은 자민당과 다를 바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011년 쓰나미와 지진,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한꺼번에 겪으며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결정적인 신임을 잃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겨우 3년여 만에 자민당의 아베에게 정권을 빼앗긴 후 분열을 거듭, 이제 일본인들에게 야당은 투명인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게 '이익유도 정치'라고 불리는 일본 특유의 정치 구조입니다.
자민당은 오랜 세월 국가의 재원을 농민, 자영업자 및 특정 지역에 집중 투입해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정치적 유착 관계를 만들어왔습니다. 이는 대개 지지를 약속받고, 도로, 교량, 공장 건설로 일자리나 사회인프라를 제공하고 표와 맞바꾼다 하여 '이익유도 정치' 라고 합니다.
2012년 총리에 오른 아베가 경제를 살린다며 재정적자를 무릅쓰고 전국 곳곳에서 벌인 토목 공사 역시 이익유도 정치의 일환입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정치학자들은 "큰 정치가 사라지고, 이익을 둘러싼 작은 정치만이 남았다" 고 개탄하지만, 이익을 매개로 한 탄탄한 지지층 관리는 자민당이 늘 집권 여당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의 자민당 지지는 앞으로도 계속될까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본인들의 자민당 지지율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일본인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일본인들의 투표율은 5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 주요국 중에서 가장 낮은 수치입니다. 유권자 전체 대비 자민당지지 비율은 25%에 불과합니다.
아사히신문 설문조사 결과 "투표해도 정치가 안 바뀌기 때문" 과 '정치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75%나 되었습니다. 대신 '지지하는 당 없음' 이라는 이름의 괴상한 정당에 수심만 표가 몰렸습니다. 자민당 외에 대안이 없는 일본 국민들이 투표로 개혁을 하는 대신 정치에 아예 눈을 감는 쪽을 선택하고 있는 셈입니다. 일본 국민이 다른 길을 선택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해야 합니다.
첫째는 야당이 다시 통합하고, 둘째는 일본의 경제가 더 망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돌이키기엔 모든 것이 너무 늦을 것입니다. 분석가들 사이에 이런 비관론이 자꾸만 커져가는 게 요즘 일본의 정치 현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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