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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만큼 인류를 구원한 식품은 없습니다.
하지만 감자만큼 푸대접 받은 식품도 없습니다. 국민들에게 감자를 먹이기 위해 각 나라에선 왕들이 직접 나서 온갖 묘안을 짜내야 했습니다. 감자가 유럽에 정착하는 데는 정말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감자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16세기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서입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신대륙의 감자를 유럽에 소개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습니다. 신대륙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먼 바닷길에 감자는 단지 비상식량으로 배에 올랐을 뿐입니다. 오래 뇌둬도 잘 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면 감자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에 도착할 때까지 감자는 고스란히 배에 남았습니다.
왜 스페인 사람들은 감자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까요?
그건 첫째로 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개량된 지금의 감자와는 달리 당시의 신대륙 감자는 아무 맛이 안 나는 밍밍함 그 자체였습니다. 게다가 감자는 자신들이 노예로 삼은 인디오들의 주식이라 천한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에선 뿌리를 먹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땅속에서 자라는 감자는 유럽인들 눈엔 아주 이상한 식품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중세의 상황도 감자의 보급을 더디게 했습니다. 모름지기 식품은 땅위에 있는 것만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고, 땅속의 식품은 악마들이나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천대를 받는 와중에도 스페인 땅에 버려진 감자들은 정말 쑥쑥 잘 자랐습니다. 몇몇 호기심 넘치는 사람들이 감자의 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뿌리를 먹어야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땅 밑의 감자는 버리고 땅 위의 이파리를 먹었습니다.
불행히도 감자 잎은 독초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통을 앓아야 했습니다. 역시 감자는 악마들이나 먹는 것이었습니다. 감자는 다시 버려졌습니다. 그렇지만 감자는 그 버려진 땅에서도 정말 잘 자랐습니다. 잎이 아니라 뿌리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도 조금씩 알려졌습니다. 그래도 악마의 식품을 먹는 것은 아무래도 꺼림직했습니다.
이에 성직자가 나서 감자를 먹을 때마다 성수를 뿌려 정화했습니다. 이렇게 감자에 죄 사함을 하자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이를 못마땅해 하는 성직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에 의해 감자는 종교재판대에 올랐습니다. 갑론을박 끝에 종교재판소는 감자에 화형을 선고했습니다. 감자가 신의 뜻과 달리 암수가 아닌 덩이줄기만으로 번식한다는 게 유죄의 근거였습니다.
16세기 후반 스페인령이나 다름없던 네덜란드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감자는 네덜란드까지 이어진 스페인군의 보급로를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후로도 오랫동안 유럽에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아주 드물었습니다. 아일랜드를 제외하곤 기껏해야 감자는 동물 사료로나 쓰였습니다.
음식은 대개 아래에서 시작돼 위로 퍼지는 게 일반적입니다.
즉, 늘 먹을 게 부족한 일반 백성들이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내게 되고, 이게 나중에 귀족들과 왕실로 전해지는 게 보통의 과정입니다. 하지만 감자는 정반대였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왕들은 감자를 먹이려 했고, 백성들은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17~8세기의 유럽은 전쟁의 시기였습니다. 이 때문에 유럽 각국은 늘 식량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아무데서나 마구 자라는 감자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감자를 먹으면 문둥병에 걸린다는 소문까지 겹쳐 일반 백성들의 감자 혐오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이 천대받던 감자를 일약 인류를 구원한 음식으로 만든 결정적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명이 프로이센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입니다. 18세기 중반, 프리드리히는 나라에 대기근이 들자 "감자를 재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개도 안 먹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먹느냐" 며 전국적인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식탁에 매일 감자 요리를 올리도록 했습니다.
"내가 개만도 못하다는 것이냐" 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어 프리드리히는 "이제부터 감자는 왕실과 귀족들만 먹을 수 있다" 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실 땅에 감자를 잔뜩 심은 다음 근위병을 배치해 철통 같이 지키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일부러 경비를 허술하게 하도록 했습니다. 프리드리히의 묘수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밤이 되면 황제의 감자를 훔쳐갔고, 이게 입소문을 타면서 자진해서 공터마다 감자를 심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프로이센 전역으로 감자가 퍼져나갔습니다.
지금도 프리드리히 2세는 '감자 대왕' 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묘에는 지금도 사람들이 꽃 대신 감자를 놓고 갑니다.
당시 프로이센엔 파르망티에(Antoine-Augustin Parmentier)라는 전쟁포로가 있었습니다.
프로이센은 전쟁 포로에게 돼지 먹이로 쓰이던 감자만을 주었습니다. 프랑스 농학자인 그도 3년 내내 감자만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아프지 않고 오히려 몸이 건강해졌습니다. 감자의 진가를 깨달은 프로망티에는 프랑스로 돌아와 감자 보급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파르망티에는 감자를 널리 알리려면 우선 맛부터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요리를 개발한 다음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귀족들이 참가한 궁중연회에서 이를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감자를 홍보하기 위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옷과 머리에 감자꽃을 달게 했는데 이게 귀족들 사이에 대유행하기도 했습니다. 또 파르망티에는 전쟁포로 당시 프로이센에서 경험했던 프리드리히의 방법을 프랑스 왕실에 고스란히 전했습니다. 그래서 루이 16세도 프리드리히처럼 왕실 땅에 감자를 심고 근위병으로 지키게 한 다음, 밤에는 일부러 경비를 허술하게 했습니다. 이 방법이 적중하면서 프랑스에도 대혁명 즈음애선 감자 재배가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를 기근에서 구한 파르망티에는 지금도 프랑스의 대표적 가정식 요리 중 하나인 아쉬 파르망티에(Hachis Parmentier) 등 다양한 감자요리에 그의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감자요리를 접대하기 위한 파르망티에의 초청 명단엔 당시 플아스 대사로 와 있던 토마스 제퍼슨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미국 3대 대통령이 된 토머스 제퍼슨은 파르망티에가 해준 감자튀김 요리를 못 잊어 백악관 식단에 이를 올리도록 했습니다. 이게 오늘 날 그 유명한 '프렌치 프라이' 의 기원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에 관해선 워낙 다양한 설이 존재해 확실치는 않습니다.
반면 영국의 감자 보급은 이들 나라에 비해 한참 늦었습니다.
기회는 일찍 있었습니다. 16세기 후반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총애하는 신하인 월터 롤리 경의 소개로 감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월터 롤리 경은 영국에서 맨 처음 감자를 먹고, 담배를 핀 것으로 역사에 기록된 인물입니다. 역시 뛰어난 왕답게 엘리자베스는 감자의 진가를 단박에 알아봤습니다.
그래서 궁중에서 귀족들을 모아 놓고 감자를 알리기 위한 감자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였습니다. 왕실의 요리사도 감자가 처음이라 뿌리는 버리고 이파리로 음식을 만든 것입니다. 여왕이 중독되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감자에 대한 악명만 더 높아져 그 후 200년도 넘게 영국에선 감자가 발도 붙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굶주림에는 장사가 없었습니다.
산업혁명으로 18세기 중반부터 도시 빈민이 급증하고, 19세기 초엔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이 겹치면서 영국도 어쩔 수 없이 정부가 나서 대대적인 '감자 먹기 캠페인' 을 벌였습니다. 여기엔 노동자의 최저 생계비를 줄여 임금을 낮추려는 자본가들의 계산도 깔려 있었습니다.
이 캠페인의 하나로 영국 해군은 비타민 C가 풍부한 감자를 넣은 카레라이스를 개발했습니다.
묽은 인도 카레와 달리 영국 해군의 카레는 흔들리는 배에서도 먹을 수 있도록 되게 만들었습니다. 이게 오늘 날 우리도 즐겨 먹는 그 카레라이스입니다. 감자 덕택에 영국은 대륙봉쇄령을 견뎌 낼 수 있었고, 19세기 중반이 되자 런던 곳곳에 피쉬 앤 칩스 입이 즐비할 정도로 감자는 빠르게 영국인들이 가장 늘겨 먹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감자 재배는 유럽인들의 육식 섭취도 증가시켜 주었습니다. 겨울철에 사람이 먹을 것도 없었는데 동물 먹일 사료가 있을 리 없지요.
그래서 겨울이 오기 전 동물을 모두 잡아 햄이나 소시지로 염장해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감자가 동물 사료 역할을 하면서 유럽인들은 한 겨울에도 신선한 고기를 통해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감자는 유럽에 들어온 지 200년이 지나서야 유럽인들의 식탁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감자는 사하라 사막에서 북극권의 그린란드까지 어디서나 잘 자랐습니다. 더구나 1년에 3모작까지 가능한 영양식품이었습니다.
이 덕에 유럽은 18세기 중반이 되어서 역사상 처음으로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해결되니 인구도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 늘어난 인구는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공장 노동자가 되면서 산업 혁멸으로 이어졌습니다. 인구 증가는 군사력의 강화로도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식민지 정복 전쟁을 벌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독일의 괴테가 말했습니다. "감자는 신이 내린 가장 큰 축복이다"
최소한 유럽인들에게는 이게 딱 맞는 평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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