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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가 불과 4~5mm 밖에 안 되는 검은 알갱이인 후추.
이 후추가 지금의 세계를 만들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사실입니다.
어떤 세계든 음식을 오래 보존하는 것은 인류의 가장 큰 숙제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소금에 절이는 염장입니다. 특히 육식을 주로 하는 유럽에선 겨울이 오기 전 사육하는 동물을 모두 잡아야 했습니다. 사람 먹을 것도 부족한데 동물 먹일 사료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냉장하는 방법이 없었으니 소금을 잔뜩 넣어 소시지와 햄을 먼들었지요. 소시지(Sausage)란 단어는 '소금을 친' 이라는 뜻의 라틴어 'Salsus' 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염장을 하면 할수록 누린내가 심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준 게 바로 후추입니다. 후추는 고기의 누린내도 없앴고, 방부제의 효능도 있어서 고기가 쉽게 변질되는 것도 막아 주었습니다. 더구나 고기의 맛도 훨씬 좋게 해주었지요.
이러니 고기에 후추를 뿌려서 한 번 맛을 본 사람은 그 다음부턴 후추 없이는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야 말로 유럽인들에게 후추는 일대 혁명이자 맛의 신세계였습니다. 후추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대략 기원전 4세기경입니다. 아라비아 상인들이 소위 '스파이스루트(Spice Route)'를 통해 동방의 비밀스런 장소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나 레바논의 베이루트에 후추를 가져다 놓습니다. 그러면 지중해 무역을 장악했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가 전 유럽에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무역 독점을 위해 그들이 후추를 어디에서 구해오는지 극비리에 부쳤습니다. 당연히 후추는 어마어마하게 비쌌습니다. 원산지에 비해 유럽의 후추는 100배 이상의 가격에 거래되었습니다. 너무 비싸 평민들은 후추를 쓸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대신 바질이나 로즈마리 같은 유럽의 토종 향신료를 썼습니다. 후추는 왕실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죠.
12~3세기에 십자군 전쟁이 터지자 후추의 가격은 더욱 뛰어올랐습니다.
전쟁 통이라 후추의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각국에서 십자군을 모아 오면 대개 그 운송은 베네치아 상인들이 맡았습니다.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주는 후추의 원활한 조달을 위해선 십자군이 동방을 차지하는 게 절대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으로 유럽에서 후추의 가격이 폭발한 것은 15세기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들어서면서입니다. 알렉산드리아와 베이루트 등 후추의 모든 통로를 거머쥔 오스만투르크는 후추에 엄청난 세금을 매겼습니다.
때론 아예 후추 교역을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아랍 전체가 전세계에 석유 공급을 끊어 버린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니 후추 가격은 금과 다름없어서 '검은 황금'이라고 불렸습니다. 어느 정도로 비쌌나하면 후추 한줌 가격이 신발 장인의 1년 치 임금과 같았고 농노도 한 명 살 수 있었습니다. 때론 낱알 단위로도 거래되었는데 소작료나 집세 대신 후추 몇 알로 지불하기도 했습니다. 유럽의 후추 가격이 미친 수준이었던 것은 과시욕도 큰 몫을 했습니다.
어느덧 후추는 신분을 상징하는 사치품이 된 것입니다.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은 후추를 금항아리에 보관했습니다. 그러다가 연회를 열게 되면 식탁에 후추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자랑했습니다. 어떤 음식들은 아무 음식이나 후추를 처발라 내놓기도 했고, 후추를 섞은 포도주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게 자신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유럽에 가면 모든 레스토랑의 식탁에 소금과 후추가 세트로 올려져 있습니다. 후추가 과시의 수단이었던 시절 만들어진 문화로 자신의 레스토랑이 고급이란 점을 내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14세기부터 유럽에 퍼지기 시작한 페스트도 후추 가격을 올리는 데 한 몫 햇습니다. 유럽 인구의 거의 절반이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오히려 더 높아졌습니다. 씁쓸하지만 그래서 육식을 즐기는 인구가 더 늘어났고, 그만큼 후추의 소비량도 늘어났습니다.
후추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향신료의 원산지인 인도를 잧는데 목숨 건 사람들이 여기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성공만한다면 일확천금이 보장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맨 처음 뛰어든 건 포르투갈의 항해왕인 엔리케 왕자(Henrique O Navergador)입니다. 그는 아프리카를 위해 바닷섬을 무려 100 차례 넘게 대양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프리카는 속속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스코 다 가마(Vasoco da Gama)가 1498년 인도에서 후추를 가져오는 데 성공합니다. 후추 가격을 지불하던 아라비아 상인들과 달리 포르투갈은 무력함대를 동원해 인도의 후추를 강탈했습니다. 이는 나중에 인도가 네덜란드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로 이어집니다.
포르투갈의 성공에 자극밭은 스페인도 본격적인 후추 찾기에 나섰습니다. 우선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를 인도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아메리카 대륙을 찾게 돠었죠. 이로 인해 이 땅에 미국이 생기고 이후 스페인 탐험가들이 가져온 천연두로 원주민들은 대거 몰살되었습니다. 16세기 스페인이 후원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은 사상 최초로 바다를 완전히 한 바퀴 도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향신료 보고인 몰루카 제도(Molucca ls)에서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후추를 잔뜩 얻게 됩니다.
세계 곳곳에서 식민지를 두고 충돌을 벌이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토르데사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을 맺습니다.
세계 지도에 일직선으로 두 개의 선을 긋고, 한쪽은 스페인이, 또 다른 쪽은 포르투갈이 반씩 나눠 갖기로 한 것입니다. 이 조약으로 오늘날 브라질은 포르투갈어를, 나머지 남미 국가들은 스페인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과 세계를 반분하던 포르투갈은 점차 쇠락해갔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의 인구는 겨우 1백만 명이었습니다. 이 인구로는 막대한 군사력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군사력이 뒷받침이 안되니 후추 무역로를 독점하는 것도 점차 힘들어졌습니다. 이 틈을 파고든 게 네덜란드입니다. 또 다른 해양강국이었던 네덜란드는 17세기에 동인도회사를 차리면서 후추를 대거 유럽으로 들여옵니다. 얼마나 많이 들여왓던지 유럽에서 후추의 가격이 폭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점차 평민들도 후추를 먹을 수 있게 되었죠.
그럼에도 이에 질세라 벨기에 프랑스 영국이 차례로 국운을 걸고 후추 쟁탈전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등이 식민지나 후추 생산기지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후추에 대한 열망은 유럽의 대항해시대를 열었고, 지리상의 발견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기술의 발전과 자본의 축척을 가져왔고 이 덕에 유럽은 모든 대륙에서 가장 먼저 중세에서 근데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4~5mm 밖에 안되는 이 작은 열매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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