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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년 4월, 스페인의 정복자 코르테스(Hernan Cortes)가 멕시코 만에 도착했습니다.
이게 얼마나 역사적인 일인지 그 자신조차 몰랐습니다. 수백 명의 백인들이 배에서 내리는 모습을 두려움에 떨며 바라보던 원주민들도 이게 무얼 뜻하는 것인지 조금도 알지 못했습니다. 인근 마을에서 종일 빨래와 요리를 하더 ㄴ여성 노예 말린체(Malinche)도 이게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님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코르테스가 도착한 멕시코엔 아즈텍 제국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제국이 자리하든 그건 코르테스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당시 스페인 탐험대는 금이 있는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찾아갈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금에 눈이 뒤집혔다고 하더라도 인구 5백만 명의 아즈텍을 상대하기엔 병력도 무장도 너무 형편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자료마다 숫자가 다르지만 최대로 치더라도 배에서 내린 스페인 군은 병사가 고작 600명 정도였고, 일을 도와주는 원주민이 300명이었습니다. 그나마 조금 내세울만한 무기가 말 16필, 대포 14문, 소총 13자루, 석궁 33대가 고작이었습니다.
이 정도 병력에 중남미 최강 아즈텍 제국이 무너졌다는 건 누가 봐도 비상식적입니다.
그래서 유독 아즈텍의 몰락에는 판타지적 냄새가 물씬 나는 몇 가지 원인이 꼽힙니다. 첫째, 코르테스를 신으로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아즈텍에는 오래전부터 농업의 신 케찰코아틀이 언젠가 다시돌아와 제국을 지배하게 될 것이란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코찰코아틀의 모습이 큰 키에 수염을 기른 백인이었습니다.
코르테스와 딱 들어맞았습니다. 그래서 아즈텍의 목테수마 2세(Moctezuma 2)황제가 코르테스 일행을 수도인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오늘날의 멕시코시티)으로 쉽게 들인 것이 멸망의 원인이란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엔 착각했는지 몰라도 이들이 신이 아니란 것을 아즈텍인들은 금방 알아챘습니다. 바보가 아니라면 신이 오직 금만 탐할 리가 없다는 걸 모를 리 없습니다.
실제로 아즈텍인들은 자신들의 수도로 들어온 코르테스 일행을 공격해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기도 했습니다.
이건 아마도 아즈텍을 어리석은 집단으로 몰고 가 유럽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승자들의 흔한 역사 해석일 것입니다. 아즈텍은 중남미에서 최초의 문자를 가진 문명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즈텍은 세계 역사상 최초로 전국민의 의무교육을 시행한 나라였습니다. 인신공양과 식인습성 때문에 야만의 대표격으로 비하되지만 이들의 교육수준으로 봐선 신과 인간을 구분 못할 정도로 어리석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흔히 드는 이유는 스페인의 '압도적인 무기' 입니다.
사실 누구든 화승총이나 대포를 처음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할 것입니다. 순식간에 달려드는 말의 속도감도 당연히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말과 비슷한 크기의 가축조차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이죠. 어쨌든 유럽의 이 신식무기들이 아즈텍인들을 크게 놀라게 한 것도, 전투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가져온 것도 모두 사실이나, 그 효용성은 분명 과장되어 있습니다.
이 당시 화승총의 수준은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대포 역시 명중률은 화승총보다도 못했습니다. 아즈텍인들은 점차 말에도 적응해 단 일격에 군마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세 번째의 가장 그럴듯한 가설은 천연두입니다. 스페인 원정대는 온 몸에 세균덩어리였습니다. 유럽보다 위생적인 환경 속에 살았던 원주민들에겐 아예 면역체계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원주민들이 천연두나 홍역 같은 전염병으로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시기를 따져보면 아즈텍도 큰 피해를 보긴 했으나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코르테스가 처음 온 건 1519년 4월이고, 천연두가 아즈텍에 창궐하기 시작한 건 다음해인 1520년 9월부터입니다. 그리고 아즈텍의 멸망은 1521년 5월입니다. 천연두의 발병이 아즈텍의 전투의지를 꺾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치명타는 아니었을 것으로 요즘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보단 아즈텍이 멸망한 후 스페인인들이 이 땅에 몰려오면서 수많은 원주민이 사망하는 대재앙이 본격 시작되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즈텍을 멸망시킨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일까요?
그건 아즈텍을 제외한 나머지 부족이 스페인의 코르테스에게 적극 협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에 대한 영감을 주고, 사방을 뛰어 다니며 스페인 연합군을 만든 일등공신이 바로 여성 노예 말린체입니다. 말린체는 대략 1500년에 멕시코만에 있는 한 작은 마을의 귀족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귀족 자녀가 다니는 학교인 칼메칵(Calmecac)에서 5살 때부터 수학, 역사, 지리, 종교, 법, 예술 등 엘리트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그녀는 파란만장한 삶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재혼한 어머니가 아들을 낳은 게 화근이었습니다. 아즈텍은 여성에게도 유산 상속이 되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말린체의 어머니는 아들에게만 유산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딸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녀가 9살 때였습니다.
엘리트 교육을 받던 귀족의 딸에서 말린체는 졸지에 종일 요리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고된 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곳저곳으로 팔려 다닌 말린체는 그 덕에 각 지역의 문화와 풍습, 사고방식, 종교적 전통 등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말린체는 언어적 재능이 뛰어났던 모양입니다.
말린체는 마야어와 아즈텍어를 모두 유창하게 쓸 수 있었는데 이게 그녀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코르테스가 멕시코에 도착했을 당시 말린체는 타바스코라는 지역 귀족의 노예였습니다. 타바스코 부족은 코르테스와의 전투에서 패하자 정복자들의 시중을 들어줄 여자 노예 20명을 선물로 진상했습니다.
말린체가 그 중 한명입니다.
코르테스의 아즈텍 원정을 기록했던 베르날 디아스(Bernal Diaz)는 말린체에 대한 첫인상을 "예쁘고, 지적이며, 말을 자신 있게 잘하는 여성" 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말린체의 언어 구사 능력을 알게 된 코르테스는 그녀를 곧 노예가 아닌 통역관으로 배치했습니다. 당시 코르테스 원정대는 스페인 출신의 아길라르(Aguilar)라는 인물이 통역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근 해안가에서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오랜 세월 마야의 포로로 생활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코르테스가 스페인 어로 말하면 아길라르가 마야어로, 그리고 말린체가 이를 다시 아즈텍어로 통역했습니다. 그런데 말린체의 언어 습득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몇 달 만에 스페인어에도 능통해져 모든 통역을 혼자 맡게 되었습니다.
이후부터 코르테스가 가는 길에는 그 어디든 늘 말린체가 한 몸처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말린체는 통역 뿐 아니라 아즈텍 정복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코르테스에게 제공했습니다.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건 아즈텍의 심각한 내부 분열에 관한 정보였습니다.
말린체는 "대다수 부족들이 아즈텍 황제의 지배에 불만이 많기 때문에 이를 뒤엎을 강력한 세력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 고 코르테스에게 얘기해 주었습니다. 아즈텍은 유별난 인신공양과 식인으로 악명 높았습니다.
아즈텍은 멕시코 전역에 마야, 타바스코, 틀락스칼라 등, 30여개의 속국을 두고 있었습니다.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아즈텍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이들을 모두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부러 공물을 받는 속국으로 놔두었습니다. 인신공양에 쓸 인간 사냥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즈텍은 제물이 필요할 때면 이들 속국에 전쟁을 전포하고, 전쟁 날짜를 통보했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전사들을 보내 원하는 숫자만큼의 전쟁 포로를 잡아왔습니다. 일종의 약속 대련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기는 칼과 창이 아닌 흑요석이 박힌 나무 몽둥이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실수로 죽여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당시의 이런 제물사냥용 전쟁을 '꽃 전쟁' 이라고 불렀습니다.
암튼 아즈텍은 '꽃 전쟁' 에 응하지 않는 속국에겐 전 병력을 보내 아예 말살을 시켜 버렸습니다. 아즈텍의 속국들은 사실상 아즈텍의 제물들을 길러 내는 인간사육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불만이 폭발지경인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만난 스페인 군은 아즈텍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고, 포용적인 사람들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린체는 코르테스와 함께 이들을 적극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인신공양 폐지도 약속했습니다. 게다가 여러 차례 아즈텍과의 전투에서 스페인의 압도적인 힘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수많은 부족들이 스펭니 정복자들의 편에 합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간 쌓인 불만을 코르테스를 통해 한꺼번에 폭발시킨 것입니다.
이 덕에 코르테스는 전력의 열세를 만회할 수 있었고, 식량이나 무기 같은 보급 문제까지 해결하게 되면서 결국에는 아즈텍을 무너뜨리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말린체는 코르테스가 아즈텍을 정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코르테스도 한 편지에서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하느님 다음으로 말린체의 공이 크다" 고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아즈텍이 무너지자 말린체가 할 일도 더 이상 없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522년 둘 사이에는 마르틴이라는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역사상 최초의 공식적인 메소티소(Mestizo)입니다. 본토에 부인이 있던 코르테스는 이 후 말린체에게 많은 땅을 준 다음 부하 장교와 결혼시켰습니다. 스페인 귀족 부인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엔 마리아라는 딸이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말린체는 모든 '메소티소의 어머니' 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멕시코 총독에 오른 코르테스는 나름 원주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인신공양과 식인을 엄금한 것은 물론 이런 악습이 재발하지 않도록 유럽에서 돼지와 소 등의 가축을 들여왔습니다. 그리고 1528년 본국으로 귀환할 때 아들 마르틴을 데리고 가 정식 기사로 키워냈고, 나중엔 유산도 상속해 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 날 코르테스는 모든 '메소티소의 아버지' 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멕시코 원주민들은 아즈텍이란 지옥을 끝냈지만 코르테스가 총독에서 물러난 후 스페인이라는 새로운 지옥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혹독한 수탈은 물론, 무엇보다 스페인이 가져온 천연두로 인구의 90% 가까이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중에는 말린체도 있었습니다. 코르테스가 스페인으로 돌아간 다음해 말린체도 천연두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귀족의 딸로 태어났지만 노예로 살아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여인.
역사상 아메리카 원주민 최초로 세례를 받았던 여인, 역사상 아메리카 원주민 최초로 스페인어를 할 수 있었던 여인, 역사상 최초의 메소티소를 낳았던 여인, 역사상 아메리카 원주민 최초로 스페인 귀족 부인이 되었던 여인, 그래서 마침내 노예의 질곡을 벗어나 이제 행복만 남은 것처럼 보였던 여인, 말린체. 겨우 29살의 꽃다운 나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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