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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중순, 튀니지의 작은 도시 시디부지드에 사는 무함마드 부아지지는 평소처럼 과일 행상에 나섰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다른 튀니지 청년들처럼 일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과일 노점상으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습니다.
이 날 팔 물건은 외상으로 받아 온 사과와 배 5상자, 그리고 바나나 7kg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사를 시작한지 얼마 안 돼 결찰 단속반에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이유는 뻔했습니다.
뇌물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생계가 막막해진 부아지지는 저울이라도 돌려달라고 사정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작은 희망조차 없어진 이 청년은 지방 청사 앞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
평소 같으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넘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상이 SNS에 떠돌아다니는 걸 아랍의 대표 방송사인 알자지라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튀니지 방송은 침묵했지만 알자지라의 보도 덕에 튀니지인 모두가 한 청년의 분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성난 이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들은 주로 재스민차를 마시며 거리에서 할 일없이 소일하던 청년들이었습니다.
높은 실업률과 빈부격차, 부정부패로 튀니지는 곪을 대로 곪아 있었습니다.
경제난에 대한 항의는 곧바로 정권 퇴진 운동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습니다. 소위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 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분노의 불길은 국경을 넘어 리비아, 이집트, 시리아, 바레인, 예멘 등으로 번져갔습니다. 보통 30년 이상 철권을 휘두르던 각국의 독재 정권이 삽시간에 무너졌습니다. 아무런 징조도 없었습니다.
'아랍의 봄' 이라는 거대한 변혁이 민주주의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중동에서 전격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10여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지금 아랍의 민주화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불행히도 민주주의는 그때보다 더 쇠퇴했습니다. 경제난도 더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아랍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거나 적합하지 않다는 '아랍 예외주의' 까지 나오고 있는 마당입니다. 그나마 튀니지가 유일한 성공 사례입니다. 24년간 통치해온 벤 알리 독재 정권을 몰아낸 후 지금까지 5차례의 총선과 대선을 무사히 치러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튀니지의 분위기는 우울합니다.
혁명 후 더 좋아졌다는 응답이 겨우 27%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이게 아랍의 봄을 겪은 나라 중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사실 그 어떤 나라보다 이집트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이집트는 오랫동안 아랍 세계를 이끌어온 실질적인 리더였습니다. 이집트에서 민주 혁명이 성공했다면 지금 아랍의 민주화 역사는 많이 달라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전 세계가 이집트를 주목했습니다.
아랍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들을 이집트도 빠짐없이 갖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집트의 실패를 보면 아랍의 민주화가 왜 어려운지도 알게 됩니다. 초반만 해도 이집트의 민주화는 순조로워 보였습니다. 30년이나 통치해온 호스니 무바라크를 끌어 내리는데 성공한 이집트인들은 아무 무력충돌 없이 선거를 통해 새 정부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선된 인물이 무함마드 무르시라는 것입니다.
대다수 이집트인들이 당황할 정도로 무척 의외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 목숨을 바쳤건만 그 결과가 이슬람 근본주의라니....죽 쒀서 개 준 꼴이었습니다.
이집트는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선출한 대통령을 부정해야 하는 이 딜레마에 이집트는 점전 더 큰 갈등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하지만 무르시가 '현대판 파라오' 라는 소릴 들을 정도로 대통령 권한 강화에 나서고, 언론 탄압까지 심해지자 거리는 다시 시위대로 가득 찼습니다. 그 다음 스토리는 뻔합니다.
혼란을 구실로 군부 쿠테타가 일어났고, 그 주모자가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2014년 이집트의 6대 대통령이 된 압델 파타 엘시시는 예상대로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습니다. 정치범만 해도 이전의 독재자 무바라크 때에 비해 6배나 많은 6만 명이나 됩니다. 엘시시는 이미 재선을 넘어 장기집권의 길을 터놓은 상태입니다. 민주화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이집트는 허망하게도 너무나 빨리 과거의 권위주의 정부로 회귀하고 말았습니다.
'아랍의 봄' 을 겪은 많은 나라들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집트와 비슷한 길을 걸었습니다.
내전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은 시리아, 리비아, 예멘에 비하면 그나마 이집트는 사정이 좀 나은 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집트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아랍의 민주화가 어려운 첫 번째 이유는 대안 세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잠깐 얘기한 것처럼 아랍의 독재자들은 보통 30년 이상씩 집권하면서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반대 세력과 시민사회의 싹을 모두 일찌감치 잘라 버렸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아랍의 봄이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당연히 민주화 세력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사람들의 기대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았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사람들의 선택지는 결국 두 가지 밖에 없게 됩니다.
군부와 종교,
그나마 교육을 받고, 조직을 갖춘 건 이 두 곳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집트는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인 '무슬림 형제단' 출신인 무함마드 무르시가 우선 선택된 것이고, 이어 군부 출신인 엘시시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게 된 것이죠.
반면 튀니지는 쿠테타를 두려워 한 전임 독재자 벤 알리가 군부를 약화시켜 놓은 덕에 군부 독재로의 회귀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근원을 따지자면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성향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이 멋대로 그어놓은 국경 탓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이슬람은 아랍어로 '순종' 을 뜻합니다. 코란에는 알라는 물론 '너희 가운데 책임 있는 자에게도 복종하라' 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독재자에 대한 저항의식을 억눌러온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같은 동남아의 이슬람 국가들은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으니 꼭 이슬람의 성향 탓이라고 보는 건 무리입니다. 그렇지만 서방 세계가 나눠 먹기식으로 그은 국경선은 아랍의 민주화에 명백한 저해요소입니다. 이질적인 부족과 종파가 한 국가에 속함으로써 이게 늘 갈등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오랜 식민지 경험으로 친서방파와 이슬람 민족주의 간의 이념적 충돌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간 아랍세계에선 강력한 정권만이 이 혼란을 막을 수 있다며 독재를 정당화해왔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을 포함한 서방 세계가 이들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수십 년 간의 장기 독재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민주화 운동이 거셌던 이집트, 리비아, 바레인의 독재자들은 미국의 오랜 협력 파트너였고, 알제리와 튀니지, 시리아의 독제자들은 프랑스의 오랜 후원을 받았습니다.
국제 정치엔 오직 국익뿐이라는 게 냉혹한 현실이지만 늘 인권을 외쳐온 서방 국가들의 이중 잣대는 아랍을 민주주의의 불모지로 만들었습니다. 아랍의 민주화가 어려운 문화적인 요인으론 부족주의(Tribalism)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조금 단순화하면 아랍 세계는 모든 걸 부족단위로 움직이고 결정합니다.
독립을 이룬지 6~70년 정도가 고작이라 국민 국가에 대한 개념도 부족하고, 역사적 맥락도 없이 한 국가를 이룬 부족들 간에 반목도 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부족주의는 오랜 유목 생활이 배경입니다.
유목은 초지와 오아시스를 놓고, 다른 부족과 목숨 건 싸움이 숙명과도 같습니다.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절대 복종이 요구되는 사회지요. 이곳에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인 다수결이나, 민주주의의 필수 기반인 갱니의 자유가 존중될 여지 자체가 거의 없습니다.
국가를 이루더라도 부족단위로 나눠 먹기 때문에 공정사회 역시 싹트기 어려운 구조이고, 가부장적인 문화의 보수성으로 교육 역시 등한시되기 때문에 민주화를 감당할 시민 사회의 형성도 무척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경제적 요인입니다.
아랍의 많은 나라들은 지대추구형 국가들 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레이트, 쿠웨이트, 오만 같은 중동의 산유국들이 그렇습니다. 이 나라들은 석유와 가스 등 땅에서 나는 천연자원에 전적으로 의존해 먹고 삽니다. 그리고 이걸 몇 개의 부족이나 왕실이 독점하지요. 이 수입을 토대로 대부분의 중동 산유국들은 국민에게 세금을 거두지 않습니다. 있더라도 형식적입니다. 그러니 정부가 국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쿠웨이트 같은 나라들은 석유 판돈을 국민들에게 보너스로 연간 수만 달러씩 그냥 나눠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국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아랍의 봄' 때도 이 나라들은 석유 판 수입으로 임금을 올리고, 복지 혜택을 늘리면서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이렇듯 지대추구형 국가들은 돈으로 독제를 강화하거나,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무관심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랍의 민주화엔 극복하기 어려운 여러 걸림돌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랍인들이 민주주의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2020년의 설문조사를 보면 아랍인들의 74%가 여전히 민주주의가 자신의 모국에 가장 적합한 정치 형태라고 믿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 어느 나라도 민주주의가 거저 생긴 곳은 없습니다.
유럽만 해도 프랑스 혁명 후 민주주의까지 200년 이상이 걸린 나라들이 있습니다. 우리 역시 4.19혁명 후 30여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니 '아랍의 봄' 도 언젠가 또 다시 갑작스럽게 찾아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꽃 하나 꺾였다고 봄이 꺾인 것은 아닐 테니 말이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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