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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은 인류에게 자유와 평등만을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오늘 날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즐거움 중 하나인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도 프랑스 대혁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릅니다. 해고된 궁전과 귀족의 개인 요리사들이 먹고 살기 위해 레스토랑을 만들고, 맛있는 요리들을 경쟁적으로 만든 덕이기 때문입니다.

요리의 기원을 따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어쩌다 불에 구워진 고기를 먹어보니 생고기보다 먹기도 편하고, 풍미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프랑스 남부에서 음식을 축축한 잎에 싸서 익히는 방법을 알아냈고, 토기가 발명되면서 음식을 찌고 삶고 끓여서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아주 오랜 세월 맛과는 동 떨어진 삶을 살아왔습니다. 대부분의 기간은 배를 채우는 데 급급했지요.

 

그래도 요리사는 꽤 오래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유럽 최초의 요리사 기록은 고대 아테네에서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노예였습니다. 귀족 집안의 음식을 담당한 이 노예들은 그래도 다른 노예들보단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로마 시대가 되면 이들 요리사가 사회에서 중요한 지위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전문요리사협회도 만들어지고, 최초의 요리학교도 로마 때 처럼 세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일부를 제외하곤 유럽 전역에서 요리라고 할 만한 음식이 사실상 없었습니다. 수도원의 수도사들 사이에서 몇 가지 요리가 전해질 뿐 이런 상황은 중세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사실 중세 분위기도 맛있는 요리 발달을 억눌렀습니다. 먹을 것 자체가 절대 부족인 시대였습니다.

거기에 교회까지 나서 맛에 대한 욕구를 마치 인간의 성적인 욕구를 대하듯 죄악시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음식 자체가 하느님이 주신 완벽한 은총이기 때문에 여기에 맛을 더한다는 것은 신의 영역 침범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게 프랑스입니다. 프랑스 요리가 서구 음식에 진정한 맛을 가져온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14세기 후반 프랑스의 궁전 요리사였던 기욤 티렐(Guillaume Tirel)이 비앙디에(Le Viandier/고기 요리)라는 프랑스 최초의 요리책을 냈습니다. 중세의 요리를 집대성한 이 책에 의하면 중세의 궁전 요리는 지금의 프랑스 요리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요리연구가들에 의하면 오히려 중동의 음식에 더 가까웠다고 합니다.

가장 풍요로운 왕실에서 조차 이 당시는 질보다 양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교회 눈치를 봐야했기 때문에 맛보단 양으로 자신의 권력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음식을 큰 상에 한꺼번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먹었습니다.

 

부를 과시하기 위해 프랑스의 왕들은 이런 정찬을 하루에 6~7번씩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대식가가 아니면 왕 노릇하기 힘들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지위와 권력을 드러내는 게 더 중요했던 이 프랑스 음식들은 당연히 맛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모든 고기들은 엄청나게 비싼 향신료로 떡칠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화려하게 보이기 위해 많은 요리들을 식용색소로 울긋불긋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오리나 학을 통으로 구어 갖가지 색을 칠한 다음 다음 연회장 곳곳을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이러다가 프랑스의 중세 요리에 큰 변혁이 오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1553년 그 유명한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medicis)가 앙리 2세와 결혼하기 위해 프랑스에 온 것입니다. 카트린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서 음식을 만들던 유명한 요리사들을 함께 데리고 왔습니다. 이들이 플아스 궁중요리사들에게 조리 비법을 전수하면서 프랑스는 드디어 '음식의 맛' 에 눈을 뜨게 됩니다.

 

게다가 프랑스는 이탈리아보다 훨씬 다양한 식재료가 있는 나라라 요리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상류층의 일일 뿐 대중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좀 더 세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중세가 지나고 르네상스 시대가 되었지만 파리에도 런던에도 음식점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상인들이나 여행자들이 묵는 숙소의 식당이 자기 집 외의 장소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이것조차 음식 종류가 가정에서 먹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손님이 메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점에서도 지금 우리가 아는 레스토랑과는 차이가 많습니다.

 

파리에 지금과 같은 음식점이 처음 들어선 것은 18세기 후반이 되어서입니다. 1765년 불랑제(Boulanger)라는 사람이 루브르 박물관 근처에 양고기 스튜 집을 열었습니다. 역사상 레스토랑이란 명칭이 붙은 첫 음식점입니다. 이 시기에 즈음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50여개의 레스토랑이 파리에 문을 열었습니다.

 

한편 프랑스의 궁중 요리는 발전을 거듭하다가 미식가였던 루이 14세(1638~1715년)와 루이 15세(1710~1774년)에 이르러 거의 완성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기 프랑스 요리는 극적으로 변모해 이전의 향신료가 범벅된 무거운 맛에서 본연의 식재료 맛을 살리는 가볍고 건강을 중시하는 조리법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요리의 큰 주류를 이루는 "누벨 퀴진(Nouvelle Cuisine)"의 원조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프랑스 요리가 완성되는 시점에 프랑스 대혁명이 터졌습니다.

왕도 죽고, 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몰락했습니다. 그 유탄을 맞은 게 요리사들입니다. 졸지에 궁전과 왕족, 귀족의 집에 고용돼 일하던 수많은 요리사들이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 대거 파리의 거리에서 포장을 치고 음식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돈이 모이면 레스토랑을 차렸습니다.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던 맛있는 요리가 드디어 대중들에게 한 발짝 다가서게 된 것입니다. 50개 정도이던 파리의 레스토랑은 혁명 후 1814년까지 무려 3,000개로 늘어났습니다.

 

맛있는 요리를 팔아 돈을 버는 '직업으로의 요리사' 가 사실상 이때 탄생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기에 마침 등장한 인물이 마리 앙투안 카렘(Marie-Antoine Careme 1784~1833년)입니다. 세계적으로 셰프로 유명해진 첫 번째 요리사입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오리사였으나 나중엔 영국과 러시아의 황실에서까지 모셔간 인물로 '요리사의 왕'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지금의 프랑스 요리를 만든 셰프입니다. 프랑스 요리가 세계의 요리에 끼친 절대적인 영향을 생각했을 때 오늘날 맛있는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이 분의 지분이 크다고 할 것입니다.

요리하면 빼놓을 수 없는 또 한명의 인물이 오귀스트 에스코피에(Auguist Escoffier 1847~1935년)입니다. 그는 프랑스 요리는 물론 지금의 레스토랑의 체계를 만든 사람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모든 음식을 테이블에 한꺼번에 쌓아 놓고 먹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날씨가 너무 추워 그렇게 먹으면 음식이 금방 식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개별 접시를 사용해왔습니다. 

 

오귀스트 에스코피에는 러시아의 이런 서빙 방식을 프랑스 요리에 받아들여 오늘날의 코스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주문지를 3장 받아 주방, 웨이터, 캐셔에게 각각 1장씩 가는 방식을 고안한 것도 그였습니다. 거기에 요리사들이 주로 입는 복장인 더블 브레스트 재킷을 만든 사람도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입니다. 

 

요리 발달에 따라 관련 용품도 속속 등장해 17세기의 부엌칼과 식탁용 나이프에 이어 마침내 포크가 19세기 초에 일반화 되었습니다. 비로소 요리를 손에 묻히지 않고도 우아하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암튼 파리는 전 유럽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레스토랑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덕에 파리는 유럽 상류층들의 국제적인 사교 문화의 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많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까지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파리는 예술과 문화도시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19세기엔 철도와 증기 기관 덕에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멀리 가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파리의 격조 높은 레스토랑과 맛있는 프랑스 요리는 세계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지구 곳곳에 맛의 신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미국 역시 오랜 세월 음식은 먹기 위해 존재할 뿐 맛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830년경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뉴욕에 Delmonico`s라는 레스토랑이 들어섰습니다. 파리에서 시작된 이 맛의 신세계를 맨 처음 주목한 사람들은 역시 돈 냄새를 잘 맡는 사업가들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호텔과 접목한 레스토랑 사업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미국 역시 여행이 폭발하던 시점이었습니다.

 

도시 곳곳에 호텔이 들어섰고, 프랑스에서 스카우트한 요리사들이 미국인들에게 맛을 전도했습니다. 수천 년 간 맛에 억눌린 삶을 살았던 인간들은 마침내 팝콘 터지듯 20세기 들어서는 맥도널드, 타코벨,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피자 헛 같은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세계적인 프랜차이즈까지 만들어 냈습니다. 맛이 이제 거대 산업이 된 것입니다.

여기저기 레스토랑이 우후죽순처럼 생기자 20세기 중반에는 맛 평론가라는 직업도 생겼습니다. 최초의 맛 칼럼니스트인 뉴욕타임즈의 크레이그 클레이본(Craig Claiborne)같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21세기가 되면 프랑스 대혁명이 맛의 대중화를 가져온 것처럼 스마트폰의 발달이 맛 평론의 대중화를 가져옵니다. 아무나 자기가 들렀던 레스토랑이나 음식의 맛을 후기로 남길 수 있게 되었고, 이를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부작용도 일부 있지만 이 덕에 사람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쉽게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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