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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의 미국 대선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건 미국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간 미국인들은 거짓말하는 정치인들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 같은 사례가 있어서입니다. 미국의 폴리티펙트(www.politifact.com)란 곳이 있습니다. 퓰리처상을 받을 정도로 최고의 공신력을 자랑하는 팩트체크 사이트입니다. 이곳에서 트럼프가 한 말의 진위를 따져보니 선거 막바지엔 70%가 거짓말이었습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 셈입니다.
하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은 조금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의 미국인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입니다. 이에 초유의 사태에 당황한 미국인들은 정치학자, 언론학자들은 물론 철학자, 심리학자까지 모두 나서 "미국이 갑자기 왜 이렇게 되었는지"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가짜 뉴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계기입니다. 그 결과로 내놓은 것이 "우리는 지금 Post-Truth시대에 산다." 는 것입니다.
진실보단 믿음이 중요한 탈진실 시대에 우리가 갑자기 접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우선 개인이 접해야 하는 뉴스와 정보가 너무 많아졌습니다. 그 전만 해도 집에서 구독하는 신문 1~2개와 TV에서 나오는 공영방송 몇 개가 뉴스원의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은 그간 인류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정보 시대를 열었습니다. 특히 유튜브와 소셜네트워크(SNS)는 정보의 홍수를 가져왔습니다. 예전의 신문과 TV가 일방통행이었다면 유튜브와 SNS는 쌍방통행입니다. 즉, 뉴스의 소비자가 뉴스의 생산자를 겸하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예전의 신문과 TV가 정해진 시간에 뉴스와 정보를 공급했다면, 지금은 스마트포늬 일반화로 24시간 정보가 흐르고 있습니다. 예전엔 직접 만나거나 일일이 전화를 걸어야 했지만, 지금은 방구석에서 손가락질 몇 번이면 수천, 수만 명과도 동시에 정보를 나눌 수 있습니다. 예전엔 기껏해야 가족이나 친구가 다였지만 지금은 전 세계인으로 범위도 넗어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24시간, 아무데서나, 전 세계인들과 주고받으니 정보 폭발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편한 것을 추구하죠.
우리의 뇌 역시 정보를 판단할 때 많은 에너지를 쓰는 걸 몹시 싫어합니다. 그래서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지면 한계점에 도달한 우리의 뇌는 소위 '인지적 게으음' 에 빠지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대충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광고는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인지적 게으름' 을 이용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수많은 제품을 앞에 두고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삼성이니까 다를 거야" 혹은 "LG니까 다를 거야" 라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광고를 하는 거죠.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인지적 게으름' 을 피우는 대신 브랜드 제품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대개 정치에 과몰입되어 있는 사람들이 타인을 '좌파나 우파' 로 쉽게 단정 짓는 걸 보게 됩니다. 이것 역시 '인지적 게으름' 의 일반적인 사례입니다. 말 한마디로, 댓글 한 개로 평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자신이 이미 쌓아 놓은 편견의 범위 내에서 대충 판단하는 것이죠. 어쨌든 이 '인지적 게으름' 은 '확증 편향' 이라는 방식을 통해 정보를 보다 더 쉽게 처리하려 합니다. 새로운 정보를 접할 때 자신의 신념에 맞으면 받아들이고, 안 맞으면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는 것이니 여기에 정보의 '옳고 그름' 은 설자리가 없게 됩니다.
인터넷 검색사이트나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이런 현상을 더욱 부채질합니다.
알고리즘은 내가 특정분야에 한 번 관심을 보이면 집요하게 같은 분야를 추천해주죠. 편향된 확증을 끊임없이 강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그 어떤 황당한 분야라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소셜미디어 모임이 있죠. 이 모임을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신념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사회적 고릅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럿이 함께 하면 책임 소재도 불분명해져 마음이 편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돼서 이미 수많은 과학적 증거가 쌓였음에도 지구평면설을 믿는 사람들도 있게 되는 거죠.
이런 현상을 두고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터(Richard Rorty)는 "요즘은 참과 거짓이 아니라 동료들이 옳다고 해주는 것들이 진리가 된다." 고 말합니다. 이게 Post Truth입니다. 탈 진실이라고 우리에겐 번역되는 이 Post-Truth는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네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의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가짜 뉴스의 시대' 란 책의 저자들은 "당신이 무엇을 믿는가는 당신이 누구와 알고 지내는가에 달려있다" 고 말하기도 합니다. 가짜 뉴스는 바로 이런 토대위에서 마치 전염병처럼 아주 쉽게 퍼집니다.
Post-Truth의 시대엔 전문가들이 아무리 명백한 증거를 내놓아도 내편의 말이 더 신뢰를 받으며, SNS를 타고 순식간에 확산되죠. 모든 사람들에게 정보가 공유되면서 전문가들이 더 이상 예전 같은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도 한 이유이고요. 언론이 기득권화되면서 불신의 대상이 된 것도 한 몫 하죠. 게다가 요즘 언론은 수많은 가짜뉴스가 난무함에도 기계적인 중립을 내세울 뿐 옳고 그름을 가려주는 진실보도에 소홀하기 일쑤입니다.
그럼 사람들이 어떤 상태일 때 가짜 뉴스에 쉽게 현혹될까요?
미국 뉴욕주의 로체스터 기술대학과 미시건 대학의 심리팀이 이에 관한 흥미로운 실험을 했는데 공통된 결과가 나왔습니다. '불안과 '분노' 를 크게 느끼면 느낄수록 가짜 뉴스를 더 쉽게 믿는 건 물론 가짜 뉴스를 더 널리 공유하는 명백한 경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최근의 코로나 시대에서 "백신 접종이 자폐증을 유발한다" 거나 "빌 게이츠가 사람들의 몸에 칩을 심어 쉽게 조종하려는 음모다" 라는 가짜 뉴스도 이런 상황에서 널리 퍼지게 된 것입니다.
영국인들은 브렉시트 찬성도 미래에 대한 불안과 양극화된 경제 상황에 대한 분노가 불러온 가짜 뉴스 탓이라는 분석도 이와 무관치 않는 것입니다. 가짜 뉴스가 가장 쉽게 퍼지는 분야는 세계 어디서나 정치권입니다. 이 집단에선 유독 역화효과(Backfire effect)가 심하게 나타납니다. 증거를 가지고 설득해봐야 사실을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의 믿음을 더 강화시키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정치 성향이 강한 집단일수록 서로 대화가 불가능한 외계인 취급을 하기 일쑤고 대화와 타협보단 법원의 판단에 맡기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게 Post-Truth 시대의 흔한 모습이죠.
사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뉴미디어 시대는 누구나 평등하게 정보를 얻음으로써 민주주의가 더 굳건해 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생상되는 가짜 뉴스가 공론의 장을 왜곡하면서 오히려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게 관련 학자들의 공통된 걱정입니다. 진실보단 같은 편의 믿음이 다 중요한 탈진실 시대엔 이전보다 더 쉽게 선전 선동이 먹혀들면서 히틀러 같은 전체주의의 망령이 다시 되살아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심어주기까지 합니다.
가짜 뉴스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이익이 숨어 있습니다.
때론 기업일수도 있고, 정치집단일수도 있고, 개인일 수도 있습니다. 2016년의 미국 대선에서 가장 많은 가짜 뉴스를 생산한 사람 중 하나는 어이없게도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에 사는 한 평범한 대학생이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뉴욕타임즈' 외의 인터뷰에서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트럼프에 유리한 글을 지어 올렸더니 돈이 몰려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에 한 번 와 본적도 없는 조지아 대학생의 돈벌이용 글이 미국의 여론을 오랫동안 들썩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정보화 시대의 독버섯처럼 자란 가짜 뉴스를 막기 위해 일부에선 법 재정을 추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국민의 펴현의 자유' 와 상충되기 때문에 법으로 일일이 규제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짜 뉴스에 현혹되지 않는 것은 아직 온전히 개인의 책임입니다. 20대 대통령 선거의 사전투표일과 선거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가짜 뉴스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모두의 현명한 선택이 절실한 때입니다.
투표장에 가기전 최소한 한 번이라도 '출처가 믿을 만한 곳인지, 내 뇌가 지금 게을러진 것은 아닌지, 혹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내가 지금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으면 하고 바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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