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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로 유명한 위대한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무려 5년간이나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16세기 후반의 '레판토 해전' 에 참전한 군인이었습니다. 유럽으로의 이슬람 진출을 막는데 큰 공헌을 한 전투지요.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세르반테스는 해적의 습격을 받아 알제리로 끌려갔습니다. 그의 품에는 스페인 제독이 써준 관료 추천서가 있었습니다. 이 덕에 세르반테스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해적들이 세르반테스를 엄청난 몸값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인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급귀족 출신으로 집안이 무척 가난했습니다.
군인이 된 것도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세르반테스는 한 수녀원의 도움으로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간신히 풀려나가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때의 빚 때문인지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 로 대단한 성공ㅇ르 거두었지만, 평생을 생활고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이렇듯 이 시대에 몸값은 무척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특히 전쟁 중 발생하기 마련인 포로들의 몸값으로 갑자기 거부가 되는 사례가 속출하기도 했습니다. 때론 국가 차원의 시스템을 갖춘 사업으로까지 발전했으니 '포로와 몸값' 은 중세 유럽의 꽤 중요한 특징이었습니다. 고대에는 포로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자는 죽거나 노예가 되는 것뿐이었습니다. 종교 전쟁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이교도는 오히려 죽여 없애는 게 미덕인 시대였습니다.
로마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간혹 포로를 풀어주고 로마의 자유민으로 인정한 사례들이 있긴 하지만 결코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포로' 라는 단어가 생긴 것 자체가 15세기 초의 일입니다. 지금이야 전쟁 포로를 함부로 죽일 수 없지만, 옛날엔 다수를 포로로 잡아 두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큰 공간이 필요했고, 포로를 관리하고 감시하기 위한 별도의 군대도 있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식량 마련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먹거리도 늘 부족한 상황이니 아예 후환을 없애는 쪽을 선택하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중세 중후반이 되면서 유럽인들은 전쟁에 대한 새로운 가치에 눈을 뜨게 됩니다.
전쟁에 참가한다는 것은 당연히 무척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돈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ㅁ낳은 봉건 영주들과 기사들이 기꺼이 전쟁에 참여한 것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이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전쟁에서 아주 큰 공을 세우면 작위와 더 많은 영지를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재산 상속을 받지 못하는 차남 이하의 기사들에게 전쟁은 곧 위기이자 기회였죠. 하지만 이 정도로 인생 역전할 만한 큰 공을 세우는 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현실적인 이득은 전리품을 챙기는 것입니다. 마을과 성을 함락한 다음 돈 되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는 거죠. 하지만 약탈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전쟁이라는 특성상, 이동을 자주하기 때문에 아무리 탐나는 물건이 있어도 그걸 다 가지고 다닐 수는 없었습니다. 몸이 무거워지면 전투 중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마을에서 금은 약탈하면 이전의 은은 그 자리에 버리는 방식으로 전리품을 수시로 갈아 치웠습니다.
그런데 잦은 전쟁 끝에 약탈보다 더 안전하고, 더 많은 돈을 버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그건 포로를 잡은 다음 몸값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즉, 포로에게 자유를 판매하는 사업입니다. 이건 순전히 어떤 인물을 잡느냐에 따라 수익성이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만약 왕이나 공작 같은 최고위 귀족을 잡았다면 그건 로또 당첨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높은 몸값을 기록한 인물은 영국의 사자왕이라 불렸던 리터드 1세입니다.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배가 좌초되는 바람에 사자왕은 신성로마제국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그는 15만 마르크의 몸값을 내고 석방되었는데, 이는 당시 영국 왕실이 연간 벌어들이는 수입의 2배가 넘는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당시 전쟁은 왕이 직접 출전하면서 간혹 포로로 잡히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프랑스의 왕 장 2세는 백년 전쟁에서 영국과 싸우다 잡혀 300만 크라운을 내야 했습니다. 이는 금 11톤에 달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이게 지금 가치로는 얼마나 될까요? 대략 금 1g을 7만 원으로 잡아도 7천억 원이 훨씬 넘는 돈이군요.
영국에 잡힌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2세도 10만 마르크를 몸값으로 내야 했는데 결국 다 값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왕이나 공작 같은 대귀족들은 부르는 게 값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투에서 가장 많은 포로가 발생하는 기사들과 그 밑의 계급들 사이엔 나름 여러 가지 규칙들이 있었습니다. 이 불문율들은 대부분 14~5세기, 왕위 계승을 두고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 기간 중 만들어졌습니다. 워낙 오래 싸우다보니 비록 적이지만 기사들끼리 서로 친해지기도 했고, 귀족 간에는 서로를 존중하는 명예 의식도 꽤 있었습니다.
우선 전투 중 포로가 되기 위해선 상대의 오른팔을 터치하며, 몸값을 물어봐야 합니다. 이건 적에게 자신을 넘기겠다는 의사 표시입니다. 이런 항복의 표시가 없다면 적은 계속 싸우려는 것으로 간주, 마지막 칼날을 휘두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몸값은 포로의 1년치 수입이 관례였습니다. 이 협상이 무사히 끝나면 포로는 몸값이 다 지불될 때까지 구금되었습니다. 포로에 대한 대우는 전적으로 포로를 잡은 사람의 호의에 달려 있었습니다. 몸값이 만족스럽다면 포로는 매우 안락한 '가택 연금' 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지휘가 높고 포로들은 자신이 항복한 사람의 가족이나 그 친구들과 교류를 하기도 했습니다. 협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 귀족이나 하위 계급들은 대개 지하 감옥행이었습니다.
하지만 1년치 수입을 갑자기 마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지위가 높은 포로들은 자신의 몸값을 스스로 마련하라고 가석방을 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이 상태서 몸값을 떼어 먹는 건 큰 불명예였습니다. 체면과 자부심이 아주 중요한 시대였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몸값을 완불하곤 했습니다.
백년 전쟁 중 영국은 프랑스 포로들이 스스로 자기 몸값을 정하도록 했습니다. 프랑스 귀족들은 부와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몸값 이상을 제시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 몸값을 갚느라 프랑스 귀족들의 파산이 속출했습니다. 이 때문에 백년 전쟁이 결국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지만 경제적인 부는 영국으로 이전됐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평민 출신의 병사들도 가끔 큰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백년 전쟁 중 영국의 윌리엄 칼로라는 궁수는 포로를 잘 잡은 덕에 100파운드를 벌었습니다. 이는 이 병사의 5년치 연봉에 해당했습니다. 백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포로들의 몸값 문화는 점차 하급 계급은 물론 병사들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병사들은 보통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 몸값이었는데 석방되기까지 먹여주고, 재워주는 비용은 별도였습니다. 하지만 적을 포로로 잡아 몸값을 받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예삿일이 아니었습니다. 포로의 관리는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었습니다.
우선 전투 현장에서 포로를 안전지대로 빼 내오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 단계를 성공하더라도 포로를 감시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전쟁터로 바로 복귀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포로를 두고 자기 소유라는 다툼도 일상사라 증거로 잡은 칼이나 장갑, 갑옷도 잘 챙겨야 했습니다. 때문에 이 일은 귀족들이 전쟁터에 데리고 다니던 시종들이 맡았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적국으로 들어가 포로의 가족에게 합의된 몸값을 통보하고 이를 받아와야 합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완불 시점까지 포로를 먹여 살리기까지 해야 하니 투자금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포로 관리는 점차 시스템화되어 갔습니다. 군인들 간의 다툼을 막기 위해 포로는 부대 단위로 공동 소유하거나 관리하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경우 포로를 잡은 사람의 권리를 왕실이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왕실은 국가 간에 몸값을 거래하는데 훨씬 용이한 행정 능력을 갖고 있었고, 이 사업으로 상당한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포로는 재산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사망하면 그 아들이 권리를 상속받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포로들이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영국의 장미 전쟁이나 백년 전쟁의 하나인 아쟁쿠르(Agincourt) 전투에선 사로잡은 귀족들을 사정없이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포위당한 성이 끝까지 저항하는 경우에도 자비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몸값 덕에 전쟁이서 전사자가 대폭 줄어든 것은 분명합니다.
유럽에서 패배한 적을 노예로 삼는 것은 중세 시대에 일찌감치 사라졌지만 포로들에 대한 몸값 문화는 17세기가지 계속되었습니다. 18세기엔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고, 19세기엔 미국에서 남북전쟁 때 처음으로 포로에 대한 학살 금지를 법으로 명시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가 되어서야 제네바 협약으로 포로에 대한 대우가 오늘날과 같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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