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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대를 그린 영화를 보면 전통 의상인 흰 토가(Toga)를 입은 남자들이 비스듬히 누워 질펀하게 연회를 즐기는 장면이 꼭 나옵니다.
로마인들은 왜 이런 불편한 자세로 술과 음식을 먹었을까요? 아무리 봐도 속이 거북할 것 같은데 말이죠.
이렇게 누운 자세로 음식을 먹는 문화는 굉장히 오래 되었습니다. 다른 많은 것들처럼 이 문화도 동방에서 왔죠. 원조는 중동 메소포타미아에 자리 잡았던 고대국가 아시리아(Assyria)입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엔 BC 7세기 고대 아시리아의 전선기를 이끌었던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왕의 돋을새김 조각이 있습니다. '니네베의 가든파티' 혹은 '아슈르바니팔의 연회' 라고 불리는 이 조각을 보면 왕비는 의자에 앉아 있고, 왕은 왼팔을 베개에 기댄 채 비스듬히 누워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니네베는 궁정이 있던 아시리아의 수도입니다.
이 아시리아의 연회 방식을 온갖 군데서 해상무역을 하던 그리스가 수입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나 프레스코화를 보면 여러 남자들이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유독 많습니다. 이걸 심포지엄(symposium)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전문가들의 통론 모임을 말하지만 원래는 "함께 술을 마신다" 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로, 연회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심포지엄에 참석한 고대 그리스 남자들은 한 결 같이 왼편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습니다.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 왕처럼 말입니다. 나중의 로마인들도 마찬가지고요.
그 이유는 좀 더 뒤에 얘기하기로 하고, 그리스엔 안드론(Andron)이라는 심포지엄 전문 식당이 있었습니다.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안드론엔 보통 7개에서 규모가 큰 곳은 15개의 싱글 침대가 놓여 있었습니다.
이곳에 왼팔로 머리를 지탱하고 비스듬히 누워 밤새 웃고 떠들며 진탕 먹고 마셔대는 거죠. 진짜 부자들은 집안에 별도로 안드론을 마련해 두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화는 에트루리아로 이어집니다.
에트루리아는 로마가 아직 변방의 작은 도시국가이던 시절, 이탈리아 반도의 최강자였습니다. 피자용 화덕과 회전꼬치, 로마의 전통 의상이 된 6m 길이의 긴 토가를 만든 사람들이죠. 6세기경의 석관을 보면 한 에트루리아의 귀족 부부가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함께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아시리아, 그리스와 다른 점이라면 에트루리아에선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누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화는 에트루리아를 정복한 로마로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로마는 양치기 목동 로물루스가 이끌던 자그만 부족 집단이었습니다. 고작해야 치즈와 채소를 곁들인 '풀스(puls)' 라는 희멀건 죽으로 하루 새끼를 때웠던 사람들이죠. 그러다가 점차 세력을 키워 에트루리아를 몰아냈고, 급기야 포에니 전쟁을 통해 한니발의 카르타고를 꺾음으로써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의 곡창지대를 손에 넣었습니다.
이때부터 로마의 식탁에 오른 음식들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습니다. 정복지가 늘어감에 따라 밀, 와인, 생굴, 바닷가재, 달팽이, 멧돼지, 향신료 등 풍성하고 진귀한 식재료들이 새로 건살한 길을 따라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지배층과 부유층 사이에서 비스듬히 누워 밤새 퍼마시는 연회가 로마에서 만개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는 최고의 선진 문화였습니다. 그리스 따라하기는 로마 지배층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격조 높은 일이었습니다. 그리스에 안드론이 잇다면 로마엔 트리클리늄(Triclinium)이 있었습니다. '3개의 긴 소파가 있는 방' 이란 뜻입니다.
로마시대 영화에서 귀족들이 연회를 즐기던 화려한 홀이 바로 트리클리늄입니다. 소파는 마치 평상처럼 등받이가 없지만 푹신한 쿠션을 깔아 누워 먹기 편하도록 했습니다.
소파 하나당 3명이 넉넉하게 누울 수 있을 정도니 꽤 큰 크기입니다. 로마인들은 이 소파 3개를 U자형 혹은 ㄷ자형으로 배치했습니다. 즉, 9명이 동시에 연회를 즐긴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소파 한 가운데에 원형이나 사각 식탁을 놓아 산해진미를 쌓아 놓았습니다.
로마의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왼쪽으로 비스듬히 누워 오른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죠. 트리클리늄의 소파 배치는 ㅁ자형으로 완전히 닫힌 게 아니라 한 방향을 터놓은 것은 노예들이 끊임없이 식탁으로 음식을 날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누워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노예들의 도움 없인 불가능합니다. 노예들은 귀족이 쉽게 음식을 집어 먹게 하기 위해 작은 크기로 계속 음식을 잘랐습니다.
기본적으로 로마의 연회는 계란으로 시작해 고기를 메인으로 하고, 사과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이런 풀코스 요리를 '계란에서 사과까지' 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계란의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당시 닭과 계란은 굉장히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웬만한 연회에선 삶은 계란을 통째로 주는 게 아니라 슬라이스해서 아주 조금씩 주었습니다.
물론 요리 자체는 비싼 값을 주고 데려온 동방의 요리사들이 맡았습니다. 이들은 콕토르(coctor), 혹은 코쿠스(coquus)라고 불렸는데 오늘날 요리사를 뜻하는 쿡(cook)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누워서 먹다보니 아무래도 음식이 입가나 손에 묻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냅킨이 이 때부터 일찌감치 만들어졌습니다. 냅킨은 연회 후 맛있는 음식을 싸갈 때도 이용되었습니다. 누워서 먹기에 아무래도 불편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선 중세가 될 때까지 수프 같은 국물 요리가 상대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연회는 보통 밤 9시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짧으면 3시간, 보통은 6시간, 길어지면 9시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먹다가 피곤하면 코스 사이의 공백을 이용해 소파에서 잠깐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잘 알려진 것처럼 너무 배가 부르면 일부러 토해서 다음 코스를 먹기 위해 배를 비우기도 했죠.
연회 참가자들은 화장실도 가지 않았습니다. 필요하면 노예가 오줌 받는 병을 가져왔고, 거기에 볼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음식 찌거기는 그대로 바닥에 던져 버렸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음식은 죽은 자를 위한 것입니다.
초기 로마만 해도 죽은 가족은 집의 마루 밑 지하에 묻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으면 귀신이 붙는다고 해서 노예들조차 이를 기피했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바닥을 음식찌꺼기 모양의 모자이크로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귀족들이 누워 먹던 3개의 침대형 소파는 나중에 스티바듐(stibadium)이라는 반원형 소파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로마의 연회 문화는 5세기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사라졌지만 동로마에선 무려 11세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제 처음 부분의 질문으로 돌아와 로마인들은 왜 이런 불편한 자세로 술과 음식을 먹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누워 먹는다는 것은 지위와 권력을 상징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정도의 연회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로마의 지배층이나 부유층뿐이었고, 남자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집안의 결혼식 연회엔 여성과 아이들도 참가할 수 있었는데, 이 때도 이들은 식탁에 똑바로 앉아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로마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비스듬한 자세로 연회에 참석한 것은 로마 중반기가 넘어서입니다.
소파의 배치에서도 상석과 하석을 엄격하게 구분했습니다. 가운데는(녹색) 그 연회 참석자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자리입니다. 그 왼쪽 소파(파랑색)는 연회를 마련한 호스트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오른쪽 자리(검은색)는 지위가 가장 낮은 사람들 차지입니다. 때론 계급에 따라 음식을 달리할 정도로 로마의 연회는 신분과 구너력 순서를 철저히 따랐습니다.
로마인들이 누워서 연회를 즐긴 것은 최대한, 그리고 오랫동안 음식을 먹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보통 누운 자세는 소화에 나쁜 것이 사실이지만 왼쪽으로 눕기만 한다면 오히려 반대라는 게 요즘 의학자들의 얘기입니다. 왼쪽으로 누우면 위의 위치상 더 많은 음식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고, 식도로 음식이 역류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으며, 음식이 위장을 천천히 통과하게 해 소화에 유리하다는 걸 로마인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마져도 안 된다면 로마인들은 비상수단을 썼습니다. 바로 깃털로 목을 간질여 토하는 것 말입니다.
이탈리아의 고대 철학 교수인 알베르토 요리(Alberto Jori)는 "먹는다는 것은 문명의 최고 행위이자 살아 있음에 대한 축하"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노예의 시중을 받으며 비스듬히 누워 밤새 먹고 마시는 로마의 연회는 세계 최고의 제국을 건설했으며, 게다가 살아남기까지 한 자들의 자부심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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