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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UN에 가입된 나라는 193개국입니다.

이중 아직도 군주제를 하는 나라는 생각보다 꽤 많습니다. 무려 44개국입니다. 21세기의 이 대명천지에 23%의 나라에서 여전히 왕이 나라를 지배하거나 국가를 상징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유럽입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는 민주공화국이 만들어졌고, 지금도 그 모범을 보이는 나라들이 대다수인 대륙입니다.

그럼에도 아직 대를 이어 세습하는 왕이 10개의 나라에 있습니다.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모나코, 리히텐슈타인 등입니다. 물론 왕이 절대 권력자인 사우디아라비아나 오만 같은 중동의 일부 국가들과 달리 유럽의 군주제는 소위 "군림은 하되 통치하지는 않는다." 는 입헌군주제입니다. 하지만 이는 다실과 다릅니다.

 

유럽의 군주들은 여전히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입헌군주제 국가인 영국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마음만 먹는다면 총리를 해임할 수도 있고, 의회도 해산할 수 있으며, 공식적인 군통수권자이기 때문에 장군의 임명은 물론 전쟁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이런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지만 대를 잇다보면 미치광이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게다가 영국의 왕은 백화점에서 마음에 드는 명품백을 그냥 들고 나와도, 심지어 살인을 해도 처벌되지 않습니다.

 

왕은 초법적인 존재라 소송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정 억울하다면 왕이 아닌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영국 여행 중 실수로 공원의 비둘기를 죽였다면 약 700만 원 정도의 벌금을 물을 수도 있습니다. 죄목이 무엇일까요? 왕의 소유권 침해입니다.

그만큼 영국왕은 권한도 막강하고, 가진 것도 많습니다. 벨기에 왕도 법률의 최종 승인권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안 들면 거부 할 수 있습니다. 각료 임면권도 있기 때문에 마뜩치 않으면 총리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리히텐슈타인 왕은 벨기에 왕보다 권한도 더 세고 실제로 그 권한을 사용하기 때문에 군림도 하고 통치도 하는 왕입니다.

이런 입헌군주제를 갖고 있는 나라들은 거의 모두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의 권위와 군주의 지위가 상충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쨌든 입헌군주제 국가의 경우 왕실 유지를 위해 상당한 비용을 지출해야 합니다. 영국만 해도 매년 1400억  원 정도가 들어갑니다. 경호 같은 간접비용까지 합하면 실제 드는 돈은 이보다 훨씬 더 클 것입니다. 무엇보다 군주제는 모든 국민은 평등하며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민주공화제의 기본 원칙에 어긋난 제도입니다.

 

군주제 페지론자들이 맨 처음 내세우는 주장도 "출생 신분에 따른 차별과 특혜는 민주주의에서 용납될 수 없다." 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럽 국가에서 입헌 군주제 지지는 정말로 탄탄합니다.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왕실을 지지한다는 응답이 70% 정도나 됩니다. 그나마 스페인 왕실이 제일 인기가 없어서 2018년 조사에서 폐지해야 한다는 응답이 37%에 이르렀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입헌군주제 국가 국민들을 이 구시대의 유물 같아 보이는 왕실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는 걸까요?

첫째는 왕실의 존재가 비용보단 이익이 크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입헌군주국 중 왕실 유지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나라는 영국입니다. 하지만 왕실로 인한 경제 소득이 비용에 비할 바 없이 훨씬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실 영국의 왕실 가족은 전 세계적으로 연예인 못지않은 관심을 받습니다.

특히 왕자들이 결혼할 때마다 '세기의 결혼식' 으로 매스컴에 요란하게 장식되며 영국은 막대한 경제 특수를 누립니다. 버킹검이나 윈저 궁전의 근위병 교대식을 보러 몰려드는 사람들 덕에 생기는 관광소득만 해도 엄청납니다. 계다가 엘리자베스 여왕이나찰스 황태자가 움직이는 곳마다 수백 명의 기자들이 따라 붙으니 국가에 대한 홍보 효과는 돈으로 환산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규모는 영국보다 작아도 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모나코, 리히텐슈타인의 왕실 움직임도 세계적인 관심을 끄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영국의 금융통화위원이었던 팀 베슬리(Tim Besley)는 국가의 연간 평균 경제 성장률을 비교해 보았을 때 입헌군주국이 연간 1.03%가 더 높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왕실이 가져오는 직접적인 경제 소득에 더해 왕실의 존재가 경제 정책의 급격한 변화를 막아 그에 따른 일시적인 경제 침체를 막아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각국의 입헌군주들이 충분히 존중받을 많나 역사적 정당성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한 영국 왕실은 오늘날에도 영국인들의 자부심이니 더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룩셈부르크의 전 국왕인 샤를로트(Charlotte. 1986~1985)는 독일 나치에 대한 저항의 상징입니다. 그녀는 미국으로 직접 건너가 루즈벨트를 2차 대전에 참전하도록 설득한 인물입니다.

 

벨기에의 전 국왕인 알베르 2세(Albert ll. 1934년~)는 프랑스어권과 네덜란드어권으로 심각하게 분열된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스웨덴의 현 국왕인 칼 구스타브 16세(Carl XVI Gustaf, 1946년~)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국교 단절을 해결해 에너지 위기를 넘기게 했습니다.

 

스페인의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Juan Carlos I, 1938년~)는 군부의 쿠테타에 맞서 스페인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셋째는 입헌군주가 명예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럽에서 입헌군주제가 듀지되는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실권이 없는 사실상의 명예직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왕의 권력이 강하다면 그만큼 왕실을 없애고 싶어 하는 적들도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영국 왕의 권한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막강합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오해를 사지 않도록 철저히 정치와는 거리를 둔 삶을 살아왔습니다. 대신 정부의 손이 닿지 ㅇ낳는 자선사업과 복지 관련 행사에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얼마나 열심히 행사에 참여했던지 영국 국민의 3분의 1이 여왕을 직접 보았다고 합니다. 뉴스를 보면 엘리자베스 여왕의 옷 색상이 대부분 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국민들이 멀리서 자길 찾는데 수고롭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네덜란드 국왕은 스스로 폐하라는 호칭을 못 쓰게 하며, 총리와의 내각 구성을 논의하던 관례도 없애 버렸습니다.

스웨덴 국왕은 형식적인 법률 공포권과 총리 임명권조차도 폐지시켰습니다. 대신 많은 입헌 군주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자선과 복지 행사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반면 스페인 왕실이 상대적으로 인기 없는 이유는 군주가 절제된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국가가 경제 위기임에도 아프리카에서 호화판 사냥 여행을 즐긴 데다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까지 드러나 큰 곤욕을 치룬 바 있습니다.

 

넷째는 왕이 국민 통합을 이끌거나 국가적인 단합의 상징으로 자리매금한 덕입니다.

군주제가 특히 다민족 국가나 다종교 국가에서 국민 통합을 이루는 데 매우 유용한 체제라는 건 많은 정치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입니다. 부족과 종교의 복합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중동 국가들에 유독 절대 왕권을 가진 나라가 많은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유럽은 다종교의 문제는 없지만 벨기에의 경우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프랑스이권과 네덜란드이권의 갈등이 극심한 나라였습니다. 아마 왕실의 통합 노력이 없었더라면 그 작은 나라가 더 작은 나라들로 쪼개졌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합스부르크 왕가가 몰락하면서 10여 개 나라로 갈라진 사례가 있습니다.

영국 역시 스코틀렌드, 웨일스 등 지역적인 정체성이 뚜렷한 나라입니다.

영국 왕실이 통합에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더구나 영국 여왕은 캐나다 호주 등 12개국의 왕을 겸하고 있습니다. 만약 영국 왕실이 없어진다면 영국 연방이 유지되는 명분도 사라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입헌군주제가 국민들에게 정서적인 안정감을 준다는 것입니다.

입헌군주제가 영속성이 있는 반면 그 짝을 이루는 의워내각제는 정권 교체가 잦을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현실 정치에 만족하지 못할 경우 늘 한결 같은 품위를 가진 왕실에 위안을 받는다는 게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여론입니다. 그 덕인지, 그냥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입헌 군주제를 하는 나라들의 삶의 만족도는 굉장히 높은 편입니다.

 

UN의 조사에 따르면 가장 높은 삶의 질을 가진 10개국 중 7개국이 입헌군주제 국가입니다. 사실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 등은 모두 옛날에 한가락씩 하던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 같이 국제 무대에서 서서히 혹은 급격히 영향력을 잃어가는 나라들이지요.

그럴수록 왕실을 통해 화려했던 과거를 추억하며 위안을 삼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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