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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라이프스타일과 성향, 익명의 편안함이 자판기를 유별나게 만든다
일본은 자판기 천국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을 수 있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입니다. 전철역이라면 수십 대가 기본이죠. 사람의 통행이 별로 없는 으슥한 뒷골목에도 어김없이 몇 대의 자판가기 있습니다. 시골에 가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도 잘 다니지 않는 길가에 생뚱맞게 서 있는 자판기를 보면 좀 기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심지어 후지산 꼭대기에도 자판기가 있습니다. 정점을 찍었던 2000년도 일본의 자판기 숫자는 약 560만 개였습니다. 당시 일본 인구가 1억2,700만 명 정도였으니 무려 23명당 1개꼴인 셈입니다.
지금은 자판기가 많이 줄었다지만 여전히 400만 개가 넘습니다. 32명당 1개꼴이지요. 자판기 숫자만 따지면야 미국이 가장 많지만 밀도수는 일본이 압도적으로 세계 1등입니다.
20만 개의 자판기가 있는 우리하고는 물론비교도 안 되고요. 일본의 자판기의 천국이라고 부르는 건 단지 숫자만 많아서가 아닙니다. 일본에선 정말 다양한 걸 자판기로 팝니다. 자판기로 안 파는 게 뭔가 따져보는 게 더 쉬울지도 모릅니다.
가장 흔한 건 물론 커피를 포함한 음료수입니다. 이게 절반 정도 차지합니다. 편의점에 있는 물건은 자판기에서 모두 판다고 보면 되는데 아이스크림, 칫솔, 우산, 화장품, 간장, 낫토, 계란, 빵 등과 생맥주, 와인, 사케 등 다양한 술도 팝니다. 여기에 햄버거, 토스트, 볶음밥은 물론, 튀김우동과 라면, 미소된장국, 스프 등, 뜨거운 국물 요리를 파는 자판기도 있습니다.
심지어 스시와 생선, 바닷가재도 팔고, 놀랍게도 순금과 약혼반지, 도장을 파주는 자판기도 있습니다. 최근엔 코로나19로 인해 마스크와 검사키트 자판기도 등장했죠. 그 외에도 속옷, 드론, 장난감, 꽃, 책, 돋보기, 부적까지, 일일이 종류를 다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럼 일본에 자판기가 이토록 자판기가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독 일본에서 자판기가 연 매출 50조 원이나 되는 거대 산업으로 성장하자, 각처에서 이에 대한 분석을 내놨습니다. 미국 경제전문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 등이 내놓은 공통적인 요인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일본의 낮은 범죄율입니다. 자판기 안에는 물건만 있는 게 아니라 현금도 들어 있죠.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단 얘기입니다.
그래서 자판기를 뜯어가지 못하도록 두꺼운 철창으로 두르는 나라들이 많죠. 미국만 하더라도 주로 건물 내에 설치할 뿐, 거리에 자판기를 두는 건 꿈도 못 꿉니다. 반면 일본은 자판기가 털리는 경우가 좀처럼 없으니 안심하고 그 어느 곳이든 설치할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일본 못지않게 안전한 나라인 한국이나 싱가포르, 대만 등의 예를 본다면 낮은 범죄율은 자판기 사업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일본의 비싼 인건비와 부동산 가격입니다. 일본이 잘 나가던 시절, 임금과 부동산 가격은 가파르게 올랐습니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노동력의 부족을 가져왔고, 인건비가 낮은 자판기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었죠. 높은 임대료 부담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당연히 큰 매력이었고요.
한때 미국 전체를 사고도 남을 정도의 부동산 거품 때문에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려운 매장보단 자판기가 동일 면적당 비교에서 더 많은 수익을 창출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출산과 고령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자판기가 이미 일본에선 엄청난 인기였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30년”으로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고, 인건비가 정체된 지금 역시 인기가 변함이 없다는 점을 보면 이것이 일본의 유별스러운 자판기 사랑을 전부 설명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보단 일본인들의 라이프스타일과 문화적인 성향이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은 보통 국토의 70%가 산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더하죠. 국토의 75%가 산입니다. 그러니 인구 밀도가 굉장히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 인구의 93%이상이 도시에 삽니다.
1980년대 후반의 거품 경제가 아니더라도 이 밀집도 때문에 도시의 집값이 비쌀 수밖에 없는 구조죠. 때문에 일본인들은 대개 집값이 상대적으로 싼 대도시 주변의 작은 도시에서 출퇴근을 합니다. 출퇴근에 3~4시간 걸리는 사람들이 수두룩하죠.
실태 조사 결과, 교외 거주자의 경우 기차역까지 걷는데 평균 10여 분이 걸리고, 기차에서 내려 직장까지 또 10여 분이 걸립니다. 이 길에서 일본의 직장인들은 수십개의 각종 자판기를 만나게 됩니다. 워낙 고온다습한 나라다 보니 여름엔 음료수 하나 정도는 쉽게 뽑아 먹게 되죠.
일본은 잔업과 야근이 굉장히 많은 나라입니다. 전 세계 근로시간 조사에 따르면 일본은 22위에 불과하지만 통계에 잡히지 않는 초과근무시간을 따지면 세계 탑급니다. 따라서 늘 시간에 쫓기는 일본 직장인들은 편의점에서 줄을 서느니 자판기에서 간단히 해결하고 맙니다.
이는 자판기에서 파는 물건이 워낙 다양하기도 하고, 편의점보다 자판기의 물건이 더 저렴한 덕이기도 합니다. 실제 통계에서도 일본에서 자판기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사람은 30~50대 사이의 남성 직장인들이었습니다. 분명 신용카드 사용이 늘고 있지만, 일본은 기본적으로 여전히 현금 기반 사회입니다. 특히 자판기는 더 그렇죠.
그런데 일본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가 1,000엔 입니다. 우리 돈으로 대략 10,000원이죠.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결국 많은 동전을 휴대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하는 전부 동전이기 때문이죠. 1엔, 5엔, 10엔, 50엔, 100엔은 물론 동전으로서는 상당히 고액권인 500엔 짜리도 있습니다.
일본에 자판기가 많은 배경 중 하나가 바로 이 동전 문화입니다. 묵직한 호주머니를 가볍게 하는 최상의 방법은 자판기에 동전을 소비하는 거죠. 각자 취향껏 물건이나 먹을 것을 고르고, 각자가 동전을 넣는 자판기의 계산 방식은 일본인들에게 꽤 익숙합니다. 소위 와리캉 문화죠.
친구든, 연인이든 자기가 먹는 건 자기가 계산하는데 더치페이, 즉 와리캉은 일본에선 매우 오래전부터 내려온 풍습입니다. 일본에 자판기가 많이 퍼진 건 일본인 특유의 성향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대체적으로 낯선 사람과 어울리는 걸 무척 부담스러워합니다. 타인과의 대화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꽤 많죠.
이런 일본인들에겐 말도, 눈치도 필요 없는 자판기가 너무나 편합니다. 대표적인 게 생화 자판기죠. 샤이한 일본 젊은이들은 연인에게 꽃 사주는 걸 남이 알까 봐 무척 조심스러워합니다. 꽃가게 주인에게조차 말이죠.
이런 젊은이들은 가게가 아니라 자판기에서 꽃사는 걸 훨씬 더 편해합니다. 그래서 한때 자판기는 일본 전통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선 작은 동네의 가게도 오래된 곳이 참 많습니다. 가게 주인과 손님은 대부분 오랜 가족이나 친구 같은 관계죠.
많은 동네 사람들이 이런 가게를 중심으로 끈끈한 지역공동체를 만들다 보니 그야말로 누구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도 알게 되죠.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이런 관계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판기는 가게 주인과 가게에서 만나는 이웃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지 않아도 되는 사적 공간이 되어 주었죠.
그래서 잠시 한때 자판기가 일본의 전통적인 상호 작용을 파괴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익명의 편안함이 주는 매력이야말로 자판기가 일본 곳곳에 확산된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본의 자판기 문화를 연구한 한 대형 광고 회사 임원은 “오래된 단골 가게에서 담배 하나만을 사는 게 미안해 필요치도 않은 물건을 사는 일본인들이 많다. 하지만 자판기는 그런 부담이 없다”며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게 일본”이라고 말합니다.
그 외에도 자판기를 임대로 누구나 쉽게 설치해, 부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점, 관리회사 덕에 운영이 쉽다는 점 등도 있지만, 이는 일본인 특유의 성향에 비하면 부수적인 요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일본의 자판기는 2000년대 들어 인구 감소와 대폭 늘어난 편의점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조금씩 쇠퇴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19는 비대면 소비문화를 가져왔습니다. 비대면 소비라면 일본에선 자판기죠. 일본의 자판기 산업이 다시 활기를 찾는 요즘입니다.
- 유튜브 "지식 브런치" 채널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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