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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하면 할리우드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영화 대국은 아닙니다.

발리우드에 인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연간 영화 개봉작은 대략 5~600편 정도입니다. 반면 인도는 보통 1,000편 이상, 많을 땐 2,000편 가까이가 극장에서 상영됩니다. 최근 국제 영화계의 블루칩으로 떠오른 한국 영화는 연간 200편 정도입니다. 사실 제작편수만 따진다면 놀리우드가 있는 나이지리아가 1위지만 여긴 극장이 거의 없는 나라라 CD나 DVD용이 대부분입니다.

영화를 즐기는 인도인들의 숫자도 엄청납니다. 인도는 전국에 영화관만 1만 3천 개 이상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매일 1,400만 명의 인도인들이 영화를 봅니다.

어떤 영화를 볼까요? 바로 인도영화입니다.

인도는 할리우드 영화가 맥을 못 추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미국 영화는 전 세계 영화시장의 90%정도를 차지합니다. 하지만 인도에서만큼은 인도 영화가 90%입니다. 역대 흥행 1, 2위를 다툰 '아바타'나 '어벤져스'도 인도에선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도대체 인도 영화의 매력이 뭐 길래 이렇게 인도인들은 자국의 영화에 열광하는 걸까요?

사실 인도 영화는 수십 년째 절대 변하지 않는 정형화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인도 영화는 온갖 장르가 다 섞여 있습니다. 멜로로 시작하다가 갑자기 액션이 펼쳐지고, 이게 코미디로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스릴러와 로맨스로 바뀝니다. 이 모든 걸 한 영화에서 하다 보니 영화의 러닝타임은 보통 3시간입니다.

이처럼 영화가 여러 맛을 낸다하여 인도의 모든 음식에 들어가는 향신료 이름에 빗대 마살라 영화라고도 합니다. 마살라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은 장르가 순식간에 바뀌다 보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인도인들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다양한 언어, 다양한 인종, 다양한 신과 종교 속에서 오래 살다보니 장르의 융합이 너무 익숙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반드시 비범한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아이큐가 200 가까이 되는 천재, 혹은 엄청난 부자나 능력자가 갑자기 나타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주는 식입니다. 영화를 보러 온 일반 대중들이 마치 자신이 슈퍼맨이 된 것처럼 감정 이입을 하면서 이 비범한 인물들에 대리만족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영화가 대부분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이 빈곤층인 인도인들에게 힘센 자들이 응징당하는 것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현실에는 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극장입니다. 그래서 영화가 비극으로 끝나면 극장에는 야유가 넘쳐납니다.

뭐니 뭐니 해도 마살라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시도 때도 없이 노래와 춤판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원수와 목숨 걸고 싸우다가 갑자기 적들과 함께 춤추는가 하면, 집안의 반대로 연인과 헤어지는 슬픈 장면 뒤에 느닷없이 양쪽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아주 흥겹게 칼 군무를 추기도 합니다.

그것도 분명 주인공들은 도시에 사는데 춤추는 장소는 갑자기 초원이거나 중국의 만리장성, 이집트의 피라미드로 춤판이 벌어지는 장소가 아무 맥락 없이 바뀌기 일쑤입니다.

인도에선 영화가 흥행하기 위해선 반드시 3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1명의 남자 배우 스타와 3가지의 춤, 6곡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이 중 춤이 가장 중요해서 연기 못하는 건 괜찮지만 춤을 못 추면 아예 배우가 되기 어렵습니다. 노래가 곡당 5분 이상의 길이이니 6곡이면 최소한 30분 이상이 오직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입니다.

인도 영화가 대부분 내수용에 그치는 게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인도 문화에 익숙지 않은 외국인들에겐 아무래도 장시간 춤과 노래만 나오는 장면이 너무나 생뚱맞아 보일 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인도 영화에선 스토리 전개와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긴 춤 장면을 왜 꼭 집어넣는 걸까요?

그건 우선 인도인들의 삶을 오랫동안 지배해 온 종교 및 사회 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힌두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신인 브라흐마도, 유지의 신인 비슈누도, 파괴의 신인 시바도 모두 춤과 노래를 관장하는 신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을 모시는 힌두 의식에서도 춤과 노래가 빠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추석 같은 축제인 자트라나 오랜 세월 인도인들의 희노애락을 담아 온 전통연극 나타야도 온통 춤과 노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인도의 일반 대중들이 삶의 일부나 다름없는 춤과 노래를 영화에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할 것입니다.

마살라 영화에 춤 장면이 긴 것은 인도가 처한 언어적인 특성도 큰 몫을 합니다.

인도엔 헌법으로 지정된 공용어만 22개가 있습니다. 이 언어들은 사투리 수준이 아니라 그냥 외국어나 다름없습니다. 그 외에 10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가 2백여 개, 방언까지 합하면 3천여 개가 넘습니다. 게다가 전체 문맹률이 40%나 됩니다. 여성들만 따지면 70%에 이를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때문에 인도영화들은 각종 언어로 더빙을 하거나 자막을 달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언어에 상관없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춤과 노래에 많은 비중을 두는 것입니다.

인도 영화는 1930년대 무렵까지 무성영화로 1차 황금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발성영화 시대가 되면서 언어 문제 때문에 오히려 침체기를 맞았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게 바로 춤입니다.

이 덕에 인도영화는 더 크게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춤과 노래가 큰 이득을 가져다준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인도에선 영화를 개봉하기 두 달 전쯤에 미리 음악부터 발표합니다. 영화가 흥행하려면 가장 중요한 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남자 배우가 누구냐이고, 또 하나가 영화 음악입니다.

남자 배우와 노래가 마음에 든다면 스토리나 연기력 따위는 사실 별 상관 안합니다. 댄스 장면은 홍보 영상으로 여러 곳에 활용할 수 있고, 노래는 음원과 CD판매로 별도의 수입을 올릴 수 있습니다.

인도의 음악산업은 영화 음악의 비중이 압도적이라, 경우에 따라선 영화보다 노래가 더 큰 수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춤은 대개 영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수십 명의 여성이 등장해 집단으로 추게 되는데 이들을 아이템걸이라고 합니다. 노래는 전문 가수가 배우의 목소리를 대신하는데 이들을 플레이백 싱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톱스타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이들 역시 영화가 흥행함에 따라 인도 전역에서 당당하게 엄청난 인기를 누립니다. 흥행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도 영화음악은 큰 역할을 합니다. 개봉 전의 발표로 인도 사람들이 극장에 올 때는 이미 영화에서 나올 노래들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정숙해야 하는 우리와 달리 인도의 영화관에선 마치 마당놀이에 온 관객들처럼 모두가 열정적으로 영화에 동참합니다.

극장 안에서 떼창을 하고, 같이 따라 춤도 추고 난리가 아니죠, 이게 인도에선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영화 시작 전 스크린에 나오는 크레딧에도 '조용히 보는 사람은 내 쫓는다'는 경고까지 버젓이 나오니 말입니다. 그래서 인도에선 극장 안의 열기만으로도 영화의 흥행 여부를 점칠 수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억압받는 대중들의 슬픈 욕구가 반영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사실 마살라 영화의 댄싱 장면은 판타지나 다름없습니다. 댄서들의 의상은 최대한 화려합니다. 영화 내내 심각하게 싸우던 원수 집안이건만 춤만큼은 경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부자에게 연인을 빼앗겨 절망하고 있으면 길 가던 행인들이 갑자기 코믹춤으로 위로를 합니다. 그래서 인도 영화는 ABCD 영화라고 비아냥대기도 합니다. Any Body Can Dance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춤의 배경지가 갑자기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세계의 유명 도시나 유명 관광지로 바뀌죠.

해피하기만 하다면 지금까지의 이야기 전개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인도의 빈곤, 실업, 부패, 비위생, 카스트라는 막막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대중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장치입니다. 외국인들은 리얼리티와 너무 먼 춤추는 장면 때문에 마살라 영화에 몰입하기 힘들어 합니다.

하지만 인도인들은 오히려 현실 세계와 다르기 때문에 마살라 영화에 열광합니다. 현실에 대한 좌절이 허구성 짙은, 그들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분명 인도 영화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도시의 젊은 세대들과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중산층들은 스토리 전개가 너무 뻔한 마살라 영화에 염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인동에선 마살라 영화의 비중이 점차 줄고 있습니다. 대신 빈곤, 여성인권, 범죄 등 인도가 직면한 사회 문제를 다룬, 소위 '뉴시네마'가 더 많아지고 있지요.

인도 영화의 미래가 어떻든 지금까지 마살라 영화가 인도인들의 삶의 애환을 치유하는 거의 유일한 치료제 역할을 해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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