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인도의 선거관리원이 극한 직업인 이유

14억 명의 인구를 가진 인도의 선거는 모든 면에서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 규모를 실감하려면 미국과 유럽연합(EU) 27개국을 모두 합치고, 여기에 인도네시아, 브라질, 일본까지 한꺼번에 투표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세계 2위의 인구를 가진 나라가 세계 7위의 영토 면적에서 일제히 투표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인도 최고의 선거라면 단연 5년마다 치러지는 총선입니다. 543명의 하원의원을 뽑는 이 선거결과에 따라 인도를 이끄는 집권당과 총리가 결정되죠. 10조 원 이상의 돈이 드는, 이 지구상 최대 이벤트를 이끄는 주체는 인도 선거관리위원회입니다.

 

선관위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선거 날짜를 정하는 것입니다. 인도에선 이것조차 간단치 않습니다. 인도는 북쪽으로 추운 히말라야산맥, 남쪽으로는 무더운 인도양, 서쪽으로는 황막함 그 자체인 타르 사막, 동쪽으로는 악어가 득실거리는 안다만 제도를 가진 나라죠.

 

이 다채로운 환경을 모두 감안해 가장 날씨가 좋은 날을 골라야 합니다. 무엇보다 전국을 진흙탕으로 만드는 몬순과 40도가 훌쩍 넘는 한여름은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여기에 수많은 학교의 시험 기간, 종교마다 다른 축제도 고려해야 합니다. 이렇게 정해도 유불리를 따져오는 각 정당과 지루한 협상을 벌여야 하죠.

 

우여곡절 끝에 선거 날짜가 정해지면 이때부터 선거관리위원장은 레임덕에 빠지는 총리보다 더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됩니다. 사실 인도의 선관위 직원은 전국을 다 합쳐봐야 800명이 고작입니다. 인구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죠. 우리보다도 적은 이 숫자로 어떻게 100만 개 이상의 투표소, 9억 명의 유권자 2,300개 이상의 정당이 경쟁하는 이 방대한 규모의 선거를 치르는 걸까요?

 

그건 선관위가 공무원은 물론 선거에 필요하다면 그 어떤 물자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9년의 총선에서 인도 선관위는 치안을 맡을 군과 경찰, 투표 업무를 맡을 사무원, 불법 선거를 감시할 영상팀 등, 공무원 1100만 명을 연방 정부와 주정부에서 차출했습니다.

 

여기에 600개의 기차와 20만 대 이상의 버스 및 자동차를 선거 기간 내내 사용했죠. 아닙니다. 인도 선관위가 동원한 교통수단엔 50대 이상의 비행기와 헬리콥터, 보트, 트랙터, 오토바이, 수레와 노새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막과 밀림에서 선거 용품을 실어 나르는데 쓸 낙타와 코끼리도 수백 마리 고용했죠.

물론 이렇게 하고도 투표를 하루에 마치는 건 불가능합니다. 지난 2019년 총선은 첫 투표에서부터 개표까지 1달 반 정도 걸렸죠. 인력 활용의 효율성을 위해 전체 날짜를 7개 기간으로 나눠 특정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선거를 마치고, 그 다음 지역으로 전체가 이동해 선거를 관리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꼭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인도의 선거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요인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높은 문맹률은 큰 골칫거리입니다.

 

인도에선 9억 명의 유권자 중 약 2억5천만 명 정도가 글자를 모릅니다. 이 때문에 우리처럼 우편물로 선거 안내문을 보내는 방식은 통하지 않습니다. 시골은 주소가 명확치 않은 곳도 꽤 있어 제대로 전달도 되지 않습니다. 인도 헌법에 따르면 18세 이상의 모든 시민은 투표권이 있습니다.

 

인도 선관위는 이 투표권을 보장하기 위해 정말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합니다. 문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도에선 대략 1,000명 단위로 그룹을 만들어 담당자를 둡니다. 그리고 이들은 각 집을 찾아다니며 우편물을 전달하고, 선거 규칙과 투표방법을 일일이 설명합니다.

 

때론 투표일이 되어 이들을 투표 장소로 안내하는 일도 맡습니다. 인도는 세계 최초로 전자투표기를 전국 선거에 도입한 나라입니다. 2004년 총선부터 사용했죠. 여기에도 문맹을 위한 여러 가지 장치를 둡니다. 기호가 있고, 후보자 사진이 있고, 정당을 상징하는 그림도 있습니다.

정당을 구분하는 이 상징물은 유서가 깊습니다. 영국에서 독립한 후 치러진 1951년 첫 선거에서부터 사용했죠. 당시 문맹률은 무려 86%나 되었습니다. 글을 모르는 유권자들의 투표를 돕기 위해 선관위는 각 정당마다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전거, 오토바이, 자명종, 낫, 코코넛, 빗자루, 선풍기, 빗, 싱크대, 꽃, 베게, 크리켓 방망이 등을 자신의 상징물로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심볼에 따라 현재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소속된 인도 국민당은 연꽃당으로, 야당인 인도국민회의는 손바닥당이라고 불리기도 하죠.

 

주로 농업 기구가 등장하던 초기와 달리 최근에는 로봇, 마우스, USB, 노트북 등도 정당의 심볼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종교의 상징물과 동물은 엄격히 금지됩니다. 불필요한 갈등과 혹시나 있을 동물 학대를 막기 위해서죠.

 

인도의 수없이 많은 언어도 선거에선 보통 걸림돌이 아닙니다. 인도엔 헌법으로 지정된 공용어만 22개고, 10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만 따져도 200개가 넘습니다. 그래서 투표용지는 물론이고, 모든 선거 관련 자료는 영어와 힌디어, 그리고 해당 지역의 언어 등, 최소 3가지 이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인도인들은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임을 늘 자랑스러워합니다. 그 주된 이유가 헌법에 의한 투표권 보장이죠. 그리고 그 하이라이트는 ‘투표소는 반드시 유권자로부터 반경 2km 내에 설치되어야 한다’ 입니다.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넓은 땅에 흩어져 사는 인도인들에겐 이게 전혀 당연하지 않습니다. 유권자로부터 2km내에 투표소를 설치하기 위해 인도의 선거는 정말 스펙터클해집니다.

 

이 때문에 비용도 엄청나게 들지만, 인도 선관위는 투표권을 보장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인도 최북단 라다크엔 4,237m 높이에 한 산간마을이 있습니다. 갑자기 날씨가 나빠져, 헬리콥터가 뜰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거관리팀은 고산증 때문에 산소통까지 메고 3일 동안 산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이 마을의 유권자는 단 12명이었습니다.

 

인도 히말라야 산맥 중턱의 타시강 마을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투표소입니다. 무려 4,650m입니다. 이 마을의 유권자는 35명입니다. 선거관리팀은 헬리콥터를 타고 이 마을에 가던 중 갑작스러운 눈으로 중간에 내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든 투표소는 설치되어야 했습니다.

 

선관위 직원들은 무릎까지 오는 눈을 뚫고 45km를 트레킹했습니다. 인도 서부의 구자라트 주엔 기르 국립공원이 있습니다. 아시아 사자의 유일한 서식처로 유명하죠. 그 한 가운데 아주 오래된 힌두 사원이 있고, 단 한 명의 관리원이자 유권자가 있습니다.

 

그를 위해 5명의 인도 선거팀은 총으로 중무장하고 사자와 표범과 코브라가 언제 습격해 올지 알 수 없는 밀림을 30km나 걸었습니다. 인도 동부의 서부 뱅갈에서 벅사 호랑이보호구역을, 인도 중부의 차티스가르주에선 중무장한 공산 반군 기점을 목숨 걸고 통과했고, 안다만 제도에선 24시간 꼬박 노 젓는 배로 악어와 물뱀 등을 뚫고 외딴 섬에 가야 했습니다.

 

이처럼 인도의 선거 관리 직원들은 단 1명의 유권자만 있다면 산이든, 사막이든, 섬이든, 빙하든, 정글이든 위험한 길을 마다않고 가야 하니 이보다 더한 극한 직업도 없을 듯합니다. 매 선거마다 이들의 위험한 트레킹은 다 합쳐 1,000km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 어려운 일을 해내야 하는 선관위는 한편으론 정당과 후보들이 불법적인 선거 운동을 하지 않는지도 감시해야 합니다. 우선 선관위는 투표 지역의 주류 판매부터 금지시킵니다. 정당이 유권자에게 뇌물로 술대접을 하거나, 술에 취해 생길 수 있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죠. 집권 여당이 선거 승리를 위해 권한을 남용하는 것은 우선 감시대상입니다. 정부는 선거 기간 그 어떤 신규 사업이나, 도로 다리 등의 건설을 발표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여야 불문하고 군이 등장하는 사진이나 영상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해칠 수 있는 그 어떤 빌미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이런 지난한 선거에 비해 막상 투표나 개표는 간단한 편입니다. 유권자는 전자투표기의 후보자 옆에 있는 파란색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됩니다.

 

인도의 전자투표기는 정전에 대비해 건전지로 작동되고, 인터넷이나 USB, 블루투스 단자조차도 없어서 외부 해킹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인도의 전자투표는 여러 선거에서 그 효율과 안전성을 인정받아 무척 신뢰도도 높고, 주변국으로 수출까지 되고 있습니다.

 

이 전자투표기 덕에 개표는 인도 전역에서 단 하루면 끝납니다. 그리고 선거를 마친 사람에게는 중복 투표를 막기 위해 왼손의 검지손가락과 손톱에 보라색 잉크를 칠해줍니다. 최소 2주 동안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 특수 잉크죠. 조금 원시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어마어마한 인구를 생각해 볼 때, 이보다 나은 저비용, 고효율도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투표가 끝나면 인도에선 잉크가 칠해진 손가락을 들고, 인증샷을 찍어 일제히 SNS에 올리죠. 오늘날 보라색 잉크가 칠해진 검지손가락은 인도 민주주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사실 1947년 독립 이후 인도에서 민주주의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너무나 거대하고,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종교적으로, 계급적으로, 민족적으로, 언어적으로 분열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비웃듯 인도는 단 한 번의 군부 쿠테타도 없이 평화롭게 오랜 세월 정권 교체를 이루어왔죠. 이는 앞에서 본 것처럼 단 1명의 유권자도 민주주의 꽃이라는 선거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인도 전체가 기울인 처절한 노력이 한몫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인도인들은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3가지엔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고 말합니다.

 

타지마할과 마하트마 간디, 그리고 선거 민주주의입니다. 이 3가지 모두에 적극 동의하는 바입니다.

- 유튜브 "지식 브런치" 채널자료 -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