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알고보니, 히틀러에게 미국은 적이 아니라 오히려 우상이었다

히틀러가 가장 존경한 나라는 미국이었고, 그가 가장 존경한 사람은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였습니다. 세계 정복이라는 야욕에 불타던 히틀러는 미국이 어떻게 세계 최강대국이 될 수 있었는지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파견한 관리와 기업인, 독일 유학생 등을 통해 닥치는 대로 필요한 자료를 수집했죠. 그런데 그가 내린 결론이 비극입니다. 미국이 위대한 나라가 된 건 순수한 백인이 주도하는 국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치는 이런 결론 하에 미국의 흑인을 독일의 유대인으로 치환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인종차별법을 벤치마킹해 이를 유대인 차별에 사용했고, 이게 고스란히 홀로코스트로 이어졌습니다. 아마 유대인 학살과 관련해 지금껏 가장 덜 알려진 부분이 히틀러에 끼친 미국의 영향일 것입니다.

 

이 과정을 소개한, 미국 언론인 이저벨 월커슨의 저서, <카스트, 가장 민주적인 나라의 위선적 신분제>에 의하면 히틀러가 집권한 다음 해인 1934년 6월, 베를린의 한 건물에 제 3제국의 관리와 법률가 17명이 비밀리에 모입니다.

 

유대인 차별을 법제화 할 뉘른베르크 법의 초안을 만들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이 회의가 얼마나 중요했던지 속기사까지 참석해, 그 과정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리고 가장 오래 한 일은 관리와 기업인과 유학생이 미국에서 수집한 자료를 검토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나치들은 미국에서 가장 많이 존경을 받는 대통령들의 발언에 주목했습니다.

토머스 제퍼슨은 “두 인종이 같은 자유를 누리면서 같은 정부에서 살 순 없다.” 고 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백인과 흑인이 같이 살 수 없으니 흑인을 이주시키는 게 미국의 희망” 이라고 했습니다.

 

양쪽 다 나치의 구미를 당기는 말이었습니다. 나치가 유대인에게 하고 싶은 일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뉘른베르크 법을 만들 때까지만 해도 유대인을 집단 학살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나치의 처음 목표는 유대인을 모두 독일 밖으로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인의 더러운 피가 신성한 아리안의 피를 오염시키는 것을 막겠다는 망상이었죠.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을 추방하려 해도 받아주는 나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1938년 7월 생수로 유명한 프랑스의 휴양도시 에비앙에서 32개국이 모인 회의가 열렸습니다. 유대인 난민 문제를 다룬 국제회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 영국 등, 참석한 모든 나라가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비난만 했을 뿐, 정작 이민을 받아들이기로 한 나라는 거의 없었습니다.

1939년엔 900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독일 여객선인 세인트루이스호를 타고 미국의 마이애미 앞바다가지 갔다가 끝내 입국을 거부당해 유럽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폴란드에선 한 랍비가 무고한 어린이들만이라도 살려달라고 로마 교황청에 탄원서를 보냈지만 “이 세상에 무고한 유대인 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싸늘한 답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들은 나치로부터 가장 먼저 학살을 당한 희생자가 되었죠. 나치의 독일은 정복지가 늘어날수록 처리 해야할 유대인도 쌓여 갔습니다. 추방이 안 되느 수용소에 가두고, 결국엔 가스실로 보냈죠. 이럴 때마다 나치는 “유대인으로 문제를 제기할 서구 세계는 없을 것”이라며 안심하고 만행을 저질렀고요.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그렇듯 진짜 부유한 유대인들은 일찌감치 도피한 반면, 떠날 여유조차 없던 가난한 유대인들이 대거 희생되었습니다.

이렇듯 분면 독일에서 대학살이 벌어지기 전에 유대인을 구할 기회가 서방 세계에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 간 축적된 기독교 세계의 반유대주의는 히틀러에게 눈을 감았을 뿐 아니라 상당수 서구 국가들이 이를 환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이들 모두가 공범이거나 최소한 방조범들인 셈입니다.

 

한편, 히틀러가 도움을 받은 미국인들 중엔 유명 우생학자들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로스롭 스타다스(Lothrop Stoddard)와 메디슨 그랜트(Madison Grant)입니다.

이들은 유럽의 ‘혈통’을 기반으로 한 혐오 이데홀로기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북유럽 인증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인종은 축출하고 제거해야 한다.” 는 이들의 저서는 나치의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명을 받았던지 히틀러는 로스롭 스타다스를 베를린으로 초대해 접견했고, 메디슨 그랜트에겐 “당신의 책은 나라에게 바이블”이라며 감사의 친서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미국의 유명인사들로부터 확신을 얻은 나치는 유대인 차별의 법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미국의 인종 차별법을 샅샅이 검토해 나갔습니다. 베를린의 17인 위원회는 ‘짐 크로’법, ‘결혼 금지법’, 이민법, 귀화법, 시민법 등, 미국의 온갖 인종 차별법을 연구해 이를 종합한 뉘른베르크 법을 만들었죠.

뉘른베르크 법은 그 다음 해인 1935년, 정식 법령으로 공포되었습니다.

“독일에서 시민권 취득은 동회회 가입만큼이나 쉽다.” 고 투덜댔던 히틀러의 불만에 따라 유대인의 시민권부터 박탈해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죠. 그리고 뉘른베르크 법은 여러 차례 강화되 결국은 우리가 아는 유대인 대학살을 만들어낸 기초가 되었습니다.

 

같은 책에 따르면 이 뉘른베르크 법을 만들면서 나치는 “유대인을 백인 취급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이 점만 뺀다면 미국의 법률 체제는 우리에게 완벽하게 적합하다.” 고 치켜세웠습니다. 그런데 법을 만들면서 17인 위원회는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 “과연 유대인을 누구로 할 것이냐”를 놓고 큰 진통을 겪었습니다.

 

이미 2,000년 가까이 혼혈이 이루어졌고, 독일에서도 중세 때부터 유대인이 있었던지라 어디까지를 유대인으로 할 것이냐를 정하는 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죠. 당시 히틀러의 친할아버지가 유대계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2010년엔 히틀러의 친척 39명의 DNA 샘플 조사로 ‘히틀러가 정말 유대인의 후손이었다’ 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죠. 어쨌든 뉘른베르크 법이 통과된 후 법 개정을 통해 나치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등 4명 가운데 2명 이상이 유대인이면 그 후손도 유대인이라고 결정지었습니다.

 

이 중 1명만 유대인이어도 유대인과 결혼했거나, 유대인 단체에 소속되어 있으면 그도 유대인이라는 부속 법안도 만들었습니다. 이를 확정 지으면서 나치는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여 있으면 흑인으로 간주하는 미국의 ‘한 방울 규칙’을 너무 가혹한 인증주의 잣대라고 오히려 비판했습니다.

 

히틀러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친 미국인 중엔 헨리 포드도 있었습니다. 그는 히틀러의 우상이었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집무실에 실물 크기의 초상화를 세워둘 정도였죠.

히틀러는 자동차광이었습니다. 그는 당면한 독일의 실업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자동차 산업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국민차인 폭스바겐 개발 사업이지요. 롤모델은 단연 컨베이어 시스템을 통한 대량 생산으로 가격을 대폭 낮춘 포드 자동차였습니다.

 

그런 자동차를 만들고 싶었던 히틀러는 포르셰 자동차로 유명한 페르디난트 포르셰 박사를 미국 포드 공장으로 보내 견학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포드 공장에서 일하던 독일 출신 기술자들을 대거 스카우트해 폭스바겐 개발에 성공했죠.

이 덕에 독일은 자동차 산업과 도로 건설로 대규모 고용 창출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쟁 준비도 다 잘할 수 있었고요.

 

그런데 히틀러가 포드를 존경한 건 자동차 때문만은 아닙니다. 둘은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유대인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점입니다. 포드는 자신의 신문사인 <디어본 인디펜던트>를 통해 “유대인의 가장 큰 문제는 사는 나라가 어디든 어김없이 드러내는 반국가성 및 반사회성” 등의 반유대주의적 칼럼을 수차례 게재한 바 있었습니다.

 

1923년 쿠테타에 실패해 투옥된 아돌프 히틀러는 감옥에서 이 칼럼을 보고 포드의 열혈팬이 되었죠. 어떤 경위를 거쳤는지는 모르나 포드는 당시로선 거금인 7만 달러를 나치 후원금으로 보냈고, 히틀러는 포드에게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이렇듯 미국은 알게 모르게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건 그만큼 미국의 인종차별이 나치 못지않았거나 그 이상이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히틀러로부터 도망쳐 온 아인슈타인도 미국의 또 다른 인종차별을 직접 보고는 이는 ‘백인들의 질병’이라고 질타했습니다.

 

그리고 이 질병은 그 많은 비극을 겪고도 여전히 지구 곳곳에서 치유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