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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옛 왕이나 귀족들의 초상화를 보면 치렁치렁한 가발을 늘어뜨린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1800년대 런던의 사교계를 담아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미드 브리저튼(Bridgerton)이나 음악 영화의 최고 걸작중 하나인 아마데우스(Amadeus)에서도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긴 가발을 뒤집어쓰고 나옵니다.
옛날 뿐 아니라 지금도 영국에선 판사들과 상하원 의장들이 아직도 가발을 쓰고 재판하거나 회의를 진행합니다.
우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약간 희극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 가발을 위 쓰게 되었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가발의 원조는 고대이집트입니다. 지금도 여러 유적지에서 가발을 쓴 미라가 출토되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3400년 고대 도시 히에라콘포리스(Hierakon polis)에서 나온 여성 미라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유럽인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생적이었습니다. 특히 머릿니를 막기 위해 남녀 가릴 것 없이 머리를 짧게 깎거나 면도로 밀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뜨거운 햇볕이 문제였습니다. 강렬한 태양으로부터 두피를 보호해야 할 그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게 가발입니다. 고대의 문명을 만들어 낸 고대이집트인들은 가발을 만드는데도 무척 뛰어났습니다.
이들은 머리와 가발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그 사이로 열이 빠져 나가고 대신 바람이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가발은 모든 이집트인들이 2~3개씩은 갖고 있는 필수품이었습니다.
가발은 곧 신분에 따라 차별화되어 갔습니다.
권력과 돈이 있는 자들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보통 사람들은 양털이나 종려나무 잎 등으로 만든 짧은 가발을 썼습니다. 사후세계에서도 가발은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특히 왕족이나 귀족, 제사장들의 화려한 가발은 죽은 사람과 함께 묻었습니다. 신분이 가장 낮은 노예와 하인들은 법으로 머리를 미는 것도, 가발을 쓰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의 가발은 로마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이집트가 위생과 권력의 상징물로 가발을 사용했다면 로마는 주로 탈모를 감추기 위한 용도였습니다. 그 유명한 카이사르(Julius Caeser)도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가발을 썼습니다.
하지만 역시 실용적인 나라답게 로마의 가발은 장식적인 이집트와 달리 짧은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잦은 전쟁에서 긴 가발은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로마 시대에도 진짜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은 무척 비쌌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가발용 노예를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그 중 가장 비싼 건 빨간 머리를 한 노예였습니다. 물론 빨간색 가발이 희귀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지금 로마 시대의 가발은 전해지는 게 거의 없습니다. 이집트와 달리 이탈리아는 비교적 습해 땅속에서 쉽게 썩기 때문입니다.
5세기 서로마가 멸망한 후 유럽에서 가발은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중세가 시작되면서 괴회가 가발 착용을 간음보다 더 큰 죄라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교회는 가발이 악마의 상징이라 교회가 아무리 축복을 내려도 그 가발에 막혀 은해를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교회에서 미사를 볼 때면 특히 기혼 여성들은 머리를 천으로 가려야 했습니다.
가발은 1천년이나 계속된 중세가 끝나고 나서야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경에는 매독이 있었습니다. 14세기의 유럽은 흑사병이 인류를 휩쓴 시기였습니다. 3명 중 한명이 죽었습니다. 신의 권위도, 교회의 권위도 모두 땅에 떨어졌습니다. 교회가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이 흔들리면서 중세는 끝났습니다. 그러면서 역사는 신보다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게 됩니다.
하지만 중세말의 이런 분위기는 두 가지의 중요한 사조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는 허탈함에서 오는 염세주의이고, 또 하나는 '현재를 즐기자(Carpe Diem)'는 쾌락주의입니다. 전자는 그간 정신세계를 지탱해온 교회 권위를 실추에서, 후자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흑사병의 만연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이 두가지가 합쳐져 나타난게 성적인 문란함입니다. 르네상스 내내 유럽인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성적인 탐닉에 빠져 살았습니다. 중세 1천년의 도덕적 억눌림에 대한 반발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군대에 의한 전쟁 성범죄가 특히 심각했습니다. 이 중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반까지 이탈리아를 침공한 프랑스군은 최악이었습니다. 이들이 저지른 집단 강간으로 유럽 전역에 매독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병' 이라고 이름 붙은 이 시기의 매독으로 6명 중 1명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가발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매독은 피부 발진과 반점, 탈모를 가져옵니다. 당시 풍성한 머리카락은 건강과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때문에 특히 왕에게 탈모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성병에 걸렸다는 의심만으로도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16~7세기부터 가발이 다시 부활한 것입니다. 긴 가발은 치욕스런 탈모는 물론 피부 발전도 숨겨주었고, 당시 골칫거리였던 머릿니(human lice)문제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를 세계적인 유행으로 만든 게 프랑스 왕실입니다. 17세기 중반의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13세는 20대 초반부터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국정부담과 바람기 많은 왕비 탓에 생긴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하지만 매독일 가능성이 큽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30대 중반부터 머리가 빠졌습니다. 역시 매독이 의심되긴 합니다만 루이 14세는 가발의 열혈 애호가였습니다. 그는 아예 48명의 가발 장인을 따로 궁전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다양하게 디자인된 가발을 때와 장소에 따라 하루에도 여러 번 바꿔 쓰며 한껏 멋을 부렸습니다.
왕이 좋아하는데 신하들이 따라 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졸지에 프랑스 궁전은 가발을 쓴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가발이 워낙 비쌌기 때문에 가난한 하급관리들은 가발처럼 보이기 위해 머리를 묶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가발은 프랑스의 모든 귀족들이 따라하게 되었고, 머지않아 전 유럽의 상류층에게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유행하면 할수록 가발은 점차 지위와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어 갔습니다.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18세기 중엽의 여성 가발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가발에 진짜 새가 든 새장을 얹는가 하면 가발에 철심을 박아 어떻게 하든 높게 만들었습니다.
이 무게를 견디지 못해 중상을 당하기도 하고, 번개 칠 때마다 두려움에 떨어야 하지만 결코 과시를 막을 순 없었습니다. 남자의 가발은 뒤로 갈수록 점차 흰색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흰색이 권위와 지성을 상징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영국의 판사와 상하원 의장이 쓰는 가발도 그래서 모두 흰색 모발입니다.
이를 퍼루크(Peruku)라고 하는데 흰색을 내기 위해선 주로 하얀 밀가루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부유한 귀족 집에선 가발에 밀가루를 뿌리는 방을 따로 두었는데 여기서 오늘날 화장하는 공간을 뜻하는 '파우더룸' 이 나왔습니다. 흰 밀가루를 뿌린 퍼루크는 가격이 무척 비싸서 평상시 쓰는 작은 가발은 보통 런던시민의 일주일치 임금을 줘야 살 수 있었습니다.
'빅 위그' 라고 불린 긴 퍼루크는 요즘 가치로 무려 1천 2백만 원 정도나 했습니다. 이 정도로 엄청난 고가임에도 대귀족 집안은 체면 때문에 마부와 집사도 퍼루크를 쓰게 했습니다. 모차르트 같은 음악가들도 궁전과 귀족 집안에서 주로 음학회가 열렸기 때문에 밀가루를 뿌린 가발이 필수였습니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은 빵이 부족해 유럽 곳곳에서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밀가루로 가발을 염색한다는 건 민중들을 분노케 하고도 남았습니다. 그러다 급기야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가발은 이제 위험한 물건이 되었습니다. 가발을 쓰고 돌아다니는 귀족은 성난 민중들로부터 우선적인 보복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혁명 후 가발은 프랑스에서 급속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영국은 비슷한 시기에 왕실이나 성직자 등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퍼루크 가발을 쓸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외의 사람이 가발 파우더용 밀가루를 사려면 별도의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 이후 새로 부유층이 된 부르주아지들도 가발에 돈을 많이 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왕족과 귀족들의 '우스꽝스러운 전유물' 로 멸시했습니다.
사실 가발을 쓰려면 누구든 큰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퍼루크 가발은 냄새도 고약했고, 해충이 들끓었으며, 때론 굶주린 쥐들의 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부르주아지들로선 단두대에서 사라져간 귀족들을 연상시키는 가발과 조금도 연관되고 싶지도 않았고, 이런 불편함은 더더구나 감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부유층과 지배층의 관심이 멀어지자 약 200년 간 신분과 권위, 지성을 상징하며 강력한 문화코드로 군림하던 가발은 순식간에 역사 속으로 퇴조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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