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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에선 꿈도 꿀 수 없는 한국의 주민등록제

우리나라에선 아기가 태어나 출생신고를 하는 순간, 국가가 13자리의 숫자를 붙여 줍니다. 이게 주민등록번호죠. 그리고 17살이 되면, 의무적으로 주민등록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당연한 걸까요?

그렇다면 대다수의 나라에선 왜 주민등록증이나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걸까요?

 

오래전부터, 광범위하게 이 개인식별번호가 사용되었기에 우리는 대부분 이에 대한 의문조차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국가는 우리를 이 숫자로 분류해 관리해오고 있습니다.

 

우린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것이 이 주민등록번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입학할 때, 입대할 때, 취직할 때, 세금 낼 때, 병원 갈 때, 집을 살 때, 이사할 때, 심지어 핸드폰 살 때도 그렇습니다.

 

이 숫자를 통해 내가 한 일은 모조리 국가에 보고 돼죠. 그러니 국가는 마음만 먹으면 내가 한 모든 일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호주, 캐나다, 일본 등,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선진국들은 일부러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번호를 만들지 않습니다.

 

물론 나라마다 나름의 개인식별번호가 있긴 합니다. 우리와 다른 점은 정부가 국민에 대한 정보 수집을 최대한 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모든 걸 주민등록번호로 통합한 우리와 달리, 선진국에선 여권, 운전, 조세, 복지 등, 목적별로 나누어 카드와 카드번호를 발급하고, 이걸 최대한 행정에 사용합니다. 그리고 대게 번호는 아무 의미 없는 일련의 숫자로 되어 있죠. 생년월일, 성별, 태어난 지방을 알 수 있는 우리의 주민등록번호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독일과 프랑스에는 전국민에게 발급하는 ID카드가 있긴 합니다. 운전면허증과 함께 신분증 역할을 하죠.

 

하지만 우리처럼 모든 일상에서 ID카드를 요구하는 일은 없습니다. 국가가 이 정보를 수집하거나 보관하는 것도 법으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고요. 게다가 평생 하나의 주민등록번호를 갖는 우리와 달리 10년간 한시적으로 사용되는 임시 번호죠.

 

이보단 의료보험번호, 연금보험번호, 납세자번호 등, 목적별로 다양한 번호를 더 많이 사용합니다. 일본도 사실상 신분증이 없는 사회입니다. 일본 정부는 여러 차례 전 국민적인 신분증을 만들려고 시도해왔습니다.

 

사실 행정 효율만 따지면 국민 모두에게 번호를 붙이는 것만큼, 편한 방법도 없습니다. 그러닥 2016년에야 우리의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마이넘버카드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극심한 반대여론 때문에 이를 의무화하지는 못했죠. 그랬더니 발급률이 2020년까진 20%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코로나로 인한 재난지원금이 이 카드와 연동되면서 최근 발급이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30%대입니다.

정부에서 순응적인 일본 국민이 왜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협조하지 않는 걸까요? 그건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사생활을 샅샅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리고 개인정보가 다른 사람에게 유출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죠. 미국 역시 전국민이 갖는 신분증은 없습니다. 다만 9개 숫자로 이루어진 사회보장번호가 그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고유의 기능인 조세, 복지는 물론, 은행, 임대, 여권발급, 인터넷 신청 등,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죠. 하지만 우리와 달리 이 번호를 통해 그 어떤 개인정보도 알 수 없습니다. 사진도 없으니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당연히 범죄자에게나 하는 지문 채취는 상상도 할 수 없죠. 발급이 강제도 아니고요.

 

신분증과 개인식별번호 없는 나라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그리고 왜 그런지를 알려면 사실 영국 사회를 들여다보면 됩니다. 많은 나라가 영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영국에서 살면서 관공서를 갈 일이 거의 없습니다. 각종 신고와 서류 때문에 뻔질나게 동사무소 등을 드나들어야 하는 우리와 달리, 영국에선 흔히 평생 3번만 가면 된다고 합니다. 출생신고, 혼인신고, 사망신고를 할 때입니다.

 

이 중 출생과 사망신고는 본인이 하지 않으니 결혼만 하지 않으면 관공서를 한 번도 가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혼인신고가 의무도 아니고요. 물론 이사를 해도 관공서에 전입신고란 게 없습니다. 이 모든 건 주민등록이란 제도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국가는 모든 국민이 어디에서 사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알아선 안 된다고 여깁니다. 영국에선 투표도 신분증 없이 할 수 있습니다. 유권자 등록이라는 절차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론 선거 날, 투표장에 가서 주소와 이름만 밝히고 원하는 후보를 찍으면 그만입니다.

 

국가는 국민의 말을 그냥 믿어야지, 함부로 신원을 의심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에선 출입국 관리도 하지 않습니다. 국민이 나라를 드나드는 것을 국가가 왜 알아야 하느냐는 것이죠.

 

주민등록증이나 주민등록번호가 없기 때문에 영국에서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권을 만들려면 반드시 신분증이 필요한데 어떻게 할까요?

 

우선 대부분의 나라처럼 운전면허증이 1차 신분증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모두가 운전면허증이 있는 건 아니죠. 이럴 땐 동네의 나름 명망있는 사람을 찾아가 여권에 붙일 사진 뒤에 “이 사람이 여권 신청인 맞음”이라고 써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걸 출생등록서와 함께 제출하면 대부분 그걸로 끝입니다.

엉성하기 짝이 없지만 국가는 국민이 그렇다는데 확실한 이유 없이 의심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여기서도 작동합니다. 개인식별번호와 신분증이 없어서 영국에선 실제로 대리투표도, 가짜여권도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영국에선 지금까지도 이걸 고수하고 있습니다.

 

역대 여러 정부에서 우리와 달리, 행정 효율을 위해 우리 같은 주민등록제도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영국 의회에선 보수와 진보가 힘을 합쳐 이를 부결시켜 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국가가 너무 많은 힘을 가질까 봐, 경계해서 입니다.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번호는 필연적으로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는데 사용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권력의 속성이기도 하고, 마치 히틀러의 독일처럼 국민이 늘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영국인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이죠.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 주민등록제가 시작될 때, 반대가 굉장히 심했습니다. 1961년 쿠테타에 성공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무엇보다 주민등록제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국민 기본권을 침해하는 악법 중의 악법”이라는 언론과 시민사회의 여론에 밀렸죠.

 

그러다가 1968년 김신조 무장간첩 사건을 계기로 이를 밀어붙였습니다. “주민의 이동실태를 파악해 남파간첩을 색출하고, 유사시 인력 동원을 위해”라는 정부의 살벌한 배경설명이 뒤따랐죠.

 

그러다가 1975년엔 지금과 같은 많은 정보가 담긴 13자리 숫자와 주민등록번호제로 개편되었습니다. 유신 시대에 국민을 일상적으로 감시하기 위한 수단이었죠. 지금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한때 2만 3000여 종에 이르는 민원서류에 주민등록번호 가입란이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정부는 출생, 결혼, 출산은 물론 학력, 병력, 병역, 혈액형 등 140개가 넘는 개인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영국을 비롯한 대다수 선진국이 두려워하는, 주민등록제가 가져올 지나친 국가 권력과 국가의 국민 통제가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것이죠. 그럼 이제 우리의 주민등록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걸 영국 같은 서구세계처럼 없애야 할까요? 아마 불가능 할 것입니다. 시작은 국민 통제였지만, 우린 이제 이 주민등록제를 기반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정부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이미 효율과 편리함, 신속성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맛봤죠.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던 코로나 대응과, 백신접종, 재난지원금 지금은 모두 주민등록번호라는 연결고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이 편리한 행정서비스에 취해서인지, 우리는 세계에서 유독 국가가 개인정보를 맘껏 가져가도 별다른 거부감이 없습니다.

 

폐지가 아니라 개선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전문가들의 견해도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정말 국가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해도 괜찮은 걸까요?

 

정말 우리는 “국가의 힘이 너무 세져 우리를 통제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서구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요?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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