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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꿈의 도시, 메트로폴리스를 처음으로 구축한 바빌론의 비결

바빌론은 서구의 기독교 사회에서 오랜 세월 동안 ‘사탄의 도시’로 낙인찍혀 왔습니다. 성적으로 타락하고, 죄악으로 가득해 하나님의 천벌이 예정된 저주 받은 도시였죠. 바빌론에 관한 전설 중 가장 유명한 바벨탑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닿을 건물을 세우겠다는 인간의 오만함에 하나님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하는 벌을 내려 더 이상 탑을 짓지 못하게 하지요. 유대인들이 이처럼 바빌론을 악마화한 것은 물론 한 맺힌 역사 때문입니다.

 

바빌론의 전성기를 이끈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기원전 6세기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다음, 왕을 포함한 여러 유대인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를 ‘바빌론 유수’라고 하는데 유수는 ‘잡아서 가둔다.’는 뜻입니다.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서 ‘히브리노예들의 합창’ 배경이 바로 ‘바빌론 유수’죠. ‘나부코’는 신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의 이탈리아어 이름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를 자신들의 역사 중 가장 치욕스런 일로 여겼습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구약성경에서 바빌론은 예루살렘 다음으로 많이 쓰인 단어였습니다. 그러면서 구약의 시편을 통해 “파괴자 바빌론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악을 그대로 갚아주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 네 어린 것을을 잡아다가 바위에 메어치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 라며 시종 끔찍한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지난 7,000년 동안 도시와 인류 간 공생의 역사를 다룬 대작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의 저자 벤 윌슨은 서양 문화에선 반()도시주의라는 뿌리 깊은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바빌론이 악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인지 유럽과 미주의 기독교 국가에선 인구 1천만 명의 도시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바빌론은 도시의 디스토피아적인 면을 강조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죠.

 

한 때 세계의 수도 역할을 했던 로마와 런던이 그랬고, 오늘날엔 뉴욕을 현대의 바빌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 불타고, 납치까지 당했으니 한탄스럽기야 했겠지만, 사실 이 시대의 전쟁에선 흔한 일이었습니다. 바빌론엔 유대인 뿐 아니라 전쟁에서 패배한 수많은 민족들이 이미 끌려와 있었습니다. 벤 윌슨은 바빌론이야 말로 진정한 메트로폴리스의 시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바빌론의 인구는 약 15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 시대에선 ‘세계의 수도’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규모였습니다.

 

이 도시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상업과 무역, 행정, 군사력 등을 유지하기 위해선 상당한 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정복지마다 사람을 끌고 왔는데 메트로폴리스답게 개방적인 분위기여서 능력 있는 자들은 관리로 등용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여럿 고위 관리가 있었으니 최소한 다른 민족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바빌론에는 노예들도 많았습니다.

 

어쨌든 삭막한 광야에서 양치기를 하던 유대인들은 당시 세계 최고 도시인 바빌론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90m 높이로 치솟은 신전을 유대인들의 세계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탑이 하늘에 맞닿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바빌론엔 경매를 이용한 독특한 결혼시장도 있었고, 여성들이 몸을 파는 매춘굴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게 유대인들 눈엔 ‘타락과 죄악의 증거’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계의 수많은 대도시를 연구한 벤 윌슨에 의하면 관능과 혼란스러움이야말로 메트로폴리스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는 ‘자연의 예측 불가능성과 다른 인간들의 야만성에 맞서기 위한 요새로 발명된 게 도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이 부대끼며 사는 혼란스러움 속에서 갖가지 혁신과 차의성이 꽃펴 대도시가 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메트로폴리스가 된 바빌론은 유대인들의 저주와 달리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깜짝 놀랄 만한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바빌론하면 누구나 알법한 4명의 인물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무래도 함무라비 대왕일 것 같습니다. 기원전 1700년경인 이 때를 고()바빌로니아라고 하는데 함무라비는 바빌론을 수도로 삼아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일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적인 성격의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하죠.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282조로 구성된 법전의 절반 이상이 경제 관련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이 때부터 벌써 바빌로니아의 상업과 교역, 사유재산화가 섬세한 법률이 필요할 만큼 상당히 발전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후 메소포타미아는 히타이트와 아시리아의 시대가 되는데, 이 시기에도 바빌론은 이 문명권에서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두 번째 인물은 많은 기독교인들로부터 저주를 한 몸에 받는, 기원전 6세기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입니다. ‘함무라비 시대의 재현’을 꿈꿨던 그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바빌론을 만든 주인공입니다. 기원전 5세기 바빌론을 직접 방문한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세계에서 가장 웅대한 도시’라고 감탄할 정도로 우선 규모가 압도적이었습니다. 성벽은 18m높이에 삼중으로 되어 있는데 얼마나 두꺼운지 성벽 위로 말 4필이 끄는 마차가 서로 교차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해자를 더해 난공불락으로 만들었죠.

 

성벽의 총 둘레가 80여km로 이 안에 주신인 마르둑(Marduk)을 모시는 신전이 55개, 약 7천만 개의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바벨탑, 고대 7대 불가사의라 불리는 공중 정원과 진흙으로 만든 수만 채의 집들이 가득했죠. 그리고 성안의 주도로는 이 시절부터 아스팔트로 포장했습니다. 주요 신전과 주출입문은 파란색 자기로 화려하게 치장했습니다. 자기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분야입니다. 때문에 토기에서 자기로 넘어왔다는 것은 인류 문명사의 중대한 진전입니다.

바빌론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상을 수만 개의 점토판에 쐐기문자로 남겼습니다. 이걸 보면 바빌론의 문명이 얼마나 고차원적인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벤 윌슨은 자신의 저서에서 “적당한 결핍이 도시를 더욱 발전시킨다.”고 했습니다.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더 많은 창의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바빌론 근처를 흐르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은 워낙 평지를 흐르다보니 때론 물줄기가 완전히 바뀔 정도로 범람이 극심했습니다. 때문에 물이 빠진 후 경계가 애매해진 사유지를 구분하는데도 대도시의 필수 기능인 하수도를 설치하는 데도 정확한 측량이 꼭 필요했습니다. 이들의 점토판을 보면 이미 60진법을 사용해 각도를 재었고,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용해 측량을 한 뚜렷한 증거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분수를 사용한 천문학자들은 별의 움직임을 관찰해 12개의 별자리를 찾아냈고 심지어 이를 이용한 기상 정보도 점토판에 남겨 놓았습니다. 여기에 의술도 발전해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도 바빌론의 자료를 주로 참고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신바빌로니아는 인류 최초로 ‘시장 경제’도 실험했습니다. 물론 기초적인 수준이었지만 사유재산권을 기반으로 토지를 사고 팔수도 있었고,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변동하는 시장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농번기와 농한기에 따라 임금이 달라졌으니 노동도 시장 경제하에 있었습니다. 경제사 연구학자들이 밀을 기준으로 실질 임금을 계산해봤더니 바빌론 노동자의 임금이 웬만한 중세 유럽의 노동자들보다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모든 거래는 은화로 결제하는 화폐 결제까지 갖췄으니 당시로는 정말 놀라운 수준이었습니다.

또한 바빌론 사람들은 여러 학문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온갖 자료를 모은 다음 영토 곳곳에 박물관과 도서관을 세워 보관했습니다. 그리고 일찌감치 학교를 만들어 이 자료들로 교육을 시켰죠. 

 

바빌론은 왕이 되는 방식도 독보적이었습니다. 다른 왕국과 달리 이곳에선 피가 같다고 왕위를 이을 수 없었습니다. 능력만 있다면 어떤 사람도, 어떤 민족도 바빌론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문화를 바탕으로 여러 민족이 조화하고, 경쟁하며 바빌론을 위대한 도시로 만든 거죠. 하지만 돌고 도는 게 역사입니다.

 

더 강력한 힘과 문명을 가진 페르시아가 나타나 기원전 539년 바빌론을 점령했습니다. 그 주인공인 키루스 대왕은 아무 조건 없이 유대인을 석방했습니다. 60여 년 만에 젖과 꿀이 흐르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건만 유대인들 중 곧바로 짐을 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도시의 단 맛에 빠져 버린 것이죠.

 

키루스는 구약성경에 ‘고레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기름 부름을 받은 자”, ‘왕 중의 왕’ ‘메시아’ 등으로 칭송받은 키루스 대왕 덕에 유대와 페르시아는 수천 년 간 매우 좋은 관계로 지냈습니다. 물론 지금은 철천지원수지요.

 

바빌론과 관계된 세 번째 인물은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전 세계를 한바탕 휘저은 뒤 알렉산더는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쉬면서 아라비아 반도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바빌론을 여러 차례 드나들며 이 도시의 매력에 빠진 알렉산더는 아라비아 원정을 마치면 제국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려고 했죠. 하지만 그가 네부카드네자르의 궁전에서 갑자기 죽으면서 이제 바빌론의 역사적 소망은 다했습니다.

 

오랜 세월 깊은 모래 속에 잠들어 있던 바빌론과 관계된 마지막 인물은 사담 후세인입니다. 네부카드네자르의 꿈이 함무라비였다면 후세인의 꿈은 네부카드네자르였습니다. 1979년부터 집권해 온 후세인은 돌연 1989년 바빌론의 재건을 선언했습니다. 이에 주변국들이 모두 긴장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바빌론의 전성기 시절 북으로는 아르메니아 남부, 남으로는 페르시아만, 서로는 이집트에 이르렀던 만큼 이라크의 영토적 야심을 경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후세인은 1년 뒤 쿠웨이트를 침공했습니다. 그렇지만 엉뚱하게도 후세인은 자신의 우상인 네부카드네자르와 나란히 선 동전을 만들더니, 바빌론의 유적지 위에 방 600개짜리 별장부터 지었습니다. 그리고 고대 궁전은 모래 밑에 그대로 뇌둔 채 그 위로 새 궁전을 지었죠. 새 벽돌에는 “네부카드네자르의 바빌론이 사담 후세인의 시대에 재현되다”라는 문구를 빼 놓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미국과의 전쟁에 패하면서 이 사업은 중단되었습니다. 후세인의 허영심에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지만 이 4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대 수도 바빌론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다시금 되새기게 해주는 데는 충분했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지 않는 도시는 무용지물” 이라고 한 벤 윌슨의 말이 맞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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