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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Vladimir Putin)은 독재자 입니다.

루소포비아(Lusofobia 러시아 혐오증)가 있는 서구 세계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당사자인 러시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2020년 개헌 투표에서 러시아 사람들은 푸틴에게 사실상 평생 집권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것도 78%라는 압도적인 지지였습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부정선거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의심할 구석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푸틴의 승리를 뒤집을 정도는 아닙니다. 이 점은 푸틴의 정적들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푸틴이 처음 대통령이 된 2000년의 지지율은 53%였습니다. 하지만 이후를 보면 2004년 71%, 2012년 64%, 2018년 77%로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리입니다. 경쟁자들하고 표의 격차가 너무나도 큽니다.

 

부정선거도 아니라면 러시아 사람들이 독재가 뭔지도 모르는 바보들일까요?

이것 역시 서구 세계에서 흔히 하는 지적입니다. 국민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무비판적으로 독재자를 지지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러시아의 40대 이상이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들인 건 맞습니다. 이들은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에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전환되는 체제변혁과 연방이 해체되는 대혼란을 한꺼번에 겪었습니다. 이들이 푸틴의 콘크리트 지지층입니다. 하지만 이는 러시아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저학력층이 극우보수를 지지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더구나 푸틴의 통합러시아당은 러시아에선 극우 근처에도 가지 않는 정당입니다.

무엇보다 교육을 충분히 받은 20~30대의 젊은층들조차 푸틴지지가 훨씬 많습니다. 조사마다 다르긴 하지만 이들의 푸틴 지지가 80%를 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정선거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라면 러시아 사람들은 그냥 독재를 좋아하는 걸까요? 독재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도라도 러시아 사람들이 독재에 익숙한 건 사실입니다.

 

러시아는 13세기부터 거의 300년 간 몽골의 혹독한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후에는 공산혁명전까지 유럽에서 가장 오랜 기간 전제군주의 통치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공산당 독재 국가였으니 독재에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박해하는 독재를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러시아만 해도 이 독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번 혁명을 일으켰던 사람들입니다. 그럼 부정선거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고, 독재를 좋아해서도 아니라면 대체 푸틴을 왜 지지하는 걸까요?

사실 답은 간단합니다. 서방세계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들에게 푸틴은 훌륭한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사람들의 푸틴에 대한 인식을 가장 단순하게 말하자면 '옐친이 망가뜨린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영웅' 입니다. 1990년대의 러시아는 '극단적인 혼란' 의 시대였습니다. 급진 개혁파인 보리스 옐친이 이끈 이 시기를 러시아 사람들은 주저없이 '잃어버린 10년' 이라고 합니다. 옐친은 1991년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에 오른 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시장 경제를 도입하려 했습니다. 그 핵심이 가격 및 생산 자유화 정책이었습니다. 이게 자본주의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던 러시아의 경제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가격 및 생산 자유화 정책이 시행되자 모든 물가가 미친 듯이 뛰어 올랐습니다. 초 인플레이션으로 러시아인들의 예금이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습니다. 시장 경제에 적응 못한 국영 기업들이 있따라 도산하면서 실업률도 치솟았습니다. 그나마 돈이 되는 에너지 산업은 올리가르히(Oligarch)라고 부르는 신흥재벌들 손에 넘어 갔습니다. 이들은 옐친의 측근들과 결탁하면서 극심한 부정부패를 가져왔습니다. 국영기업을 마구잡이로 민영화하는 과정에 알짜베기 기업들이 속속 서구로 넘어갔습니다. 지금 러시아의 반서방 정서가 이때 기인한 것입니다.

 

급기야 1998년 외환위기로 인한 모라토리엄(채무지급유예)을 선언하면서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이 막다른 길에 몰렸습니다. 이 10년 동안 러시아 경제가 얼마나 망가졌냐면 옐친이 위임하기 바로 전 해인 1990년의 1인당 GDP 5,300달러가 1998년에는 1,600달러가 되었습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이 시기 러시아의 빈곤층이 무려 90%에 달했습니다.

 

한 때 인터걸이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진 적이 있었습니다. 러시아 여대생 매춘부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이들은 호텔을 돌며 조금 할 줄 아는 영어로 서구의 비즈니스맨들에게 몸을 팔았는데, 이게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선망하는 직업이었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치안도 극도로 불안해졌습니다. 살인 범죄가 매일 같이 끝도 없이 일어났습니다. 영화를 보는 것도,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도, 버스를 타는 것도, 거리를 걷는 것도, 모두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피아들이 지하 경제를 장악하면서 이들과 결탁하지 않고선 장사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인터걸도 마피아의 흔한 사업 중 하나였습니다.

이 와중에 구소련 연방의 해체는 가속화되어 갔습니다. 특히 독립을 원하는 체첸공화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옐친의 인기는 완전히 땅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러시아의 인구는 미국의 거의 절반 수준으로 하락했습니다. 경제는 더 말할 것도 없어서 미국 GDP의 10%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한 때 미국과 양강을 이루며 냉전 시대를 이끈 러시아의 위엄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미국조차 이후 러시아를 세계 초강대국인 Global Power에서 지역 강대국을 뜻하는 Regional Power로 격하해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망한 러시아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게 푸틴입니다.

그리고 이 악몽 같던 1990년대를 기억하는 모든 세대가 지금 푸틴의 열렬한 지지자들입니다. 러시아의 혼란이 정점에 이러던 1999년 말 옐친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당시 총리이던 푸틴이 대통령 대행을 맡게 되었습니다. 사실 푸틴은 이 때까지만 해도 서방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씨였습니다. 미국이 옐친의 후계자가 될 500명을 예측했는데 그 중에도 포함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러시아 내에서도 푸틴은 KGB(구소련 국가보안위원회)출신의 평범한 관료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대통령 푸틴은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손에 넣자마자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올리가르히(신흥 재벌)들을 탈세, 사기, 횡령 등의 혐의로 대거 잡아 들였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의 일상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던 마피아들을 대거 체포하면서 질서도 빠르게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 더 이상의 민영화를 금하고, 러시아 최대 산업인 석유, 가스를 다시 국유화 했습니다. 이게 신의 한수였습니다. 마침 석유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 첫해인 2000년엔 석유가격이 5배나 뛰면서 러시아 경제가 갑자기 7%나 성장했습니다. 푸틴의 인기가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국유화한 석유, 가스 기업 덕에 폭등한 석유가격만큼 국가 재정이 튼실해져 갔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체첸과의 2차 전쟁에서 드디어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더 이상의 연방 해체를 막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푸틴의 인기가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지율이 80%를 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2014년엔 크림반도를 병합했습니다. 강한 러시아가 돌아온 것입니다. 푸틴은 이를 계기로 러시아 사람들에게 '강력한 러시아를 만드는 강력한 지도자' 로 각인되었습니다.

 

사실 푸틴은 '상남자' 이미지로 주로 언론에 노출됩니다.

직접 전투기를 몰고 군부대에 나타나는가 하면, 웃통을 벗고 호랑이나 곰 사냥을 하기도 하고, 70이 가까운 나이에 얼음을 깨고 한겨울 수영을 즐기기도 합니다. 여기에 외국 정상과의 회담마다 일부러 지각해 상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으로도 악명 높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러시아인들에겐 '강한 러시아' 의 상징물로 여겨질 뿐입니다. 이를 잘 아는 푸틴 역시 적절히 '마초 이미지' 를 연출해가며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미지 말고도 실제적인 수치가 푸틴의 집권기간 동안 러시아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푸틴이 대통령이 된 2000년도부터 2008년까지 러시아의 경제는 연 평균 7%대의 초고속 성장을 이어갔습니다. 절대빈곤층이 30%에서 14%로 줄어들었고, 평균 임금은 2배로 상승했습니다. 대학 다니는 사람은 50%가 늘었고, 청년 실업률은 4분의 1로 줄어들었습니다. 복지가 늘면서 출산율과 평균수명이 대폭 높아지고, 대신 범죄율과 자살률은 대폭 감소했습니다. 그리고 거리엔 카페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백화점에서 맘대로 물건도 살 수 있게 됐으며, 마침내 원하면 해외여행도 가능해졌습니다. 이 모든 게 이전의 러시아엔 없던 일입니다.

반면 러시아에 푸틴을 대체할 만한 정치 세력은 아주 미미합니다.

미리 푸틴이 싹을 잘라버린 때문이기도 하지만 푸틴이 속한 통합러시아 당이 전체 의석의 75% 정도를 차지하고 나머지 당은 군소정당이나 다름없습니다. 제 1 야당인 공산당은 구소련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모임 수준 정도입니다. 제2, 제3 야당들은 네오나치즘에 가까운 극우 정당이라 집권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러시아 사람들도 서구 세계만큼 자신들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에 대한 인식이 서구와는 조금 다릅니다. 유감스럽게도 러시아의 민주화에 대한 경험은 옐친 때 10년뿐입니다.

 

곧 민주화나 자유는 '극심한 혼란' 일 수도 있다는 게 러시아인들의 트라우마입니다. 반면 러시아인들은 푸틴이 이끄는 지금을 러시아 역사상 가장 살기 좋은 시대라고 말합니다. 역대 가장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고, 해외여행도 갈 수 있으며, 원하는 어떤 일도 도전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푸틴을 지나치게 비판만 하지 않으면 말입니다. 그러니 서방에선 이상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러시아 사람들 입장에선 푸틴을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푸틴이 없을 경우 다시 올지도 모르는 혼란에 대한 두려움과 현재의 만족감, 이 두 가지가 푸틴에 대한 절대 지지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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