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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에서 어떻게 개신교나 나와 갈라지게 되었는가?!

흔히 천주교와 개신교가 갈라진 계기라고 한다면 교황의 면죄부 판매와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그러나 교황의 부패에 대한 비판은 사실 루터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어 14세기 중반 잉글랜드에서는 존 위클리프라는 신학자가 등장하여 교황과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단순히 각 개인들의 부패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서 성화와 성유물에 대한 숭배, 그리고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로 바뀐다는 당대의 믿음을 비판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당대의 교리를 비판한 것의 근거는 성경에서 이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논리에서 이뤄진 교화에 대한 비판은 훗날 종교개혁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인 마르틴 루터가 그대로 이어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천주교와 개신교가 갈리지게 된 계기인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수백 년전부터 누적되어온 교회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클리프가 상당부분 루터를 앞서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와 개신교가 갈라지기 시작한 계기인 종교개혁을 떠올릴 때, 일반적으로는 가장 먼저 존 위클리프가 아니라 마르틴 루터를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14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위클리프와 16세기 초반 활동했던 루터 사이에 일어났던 하나의 기술 발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바로 구텐베르크에 의해서 유럽에서는 최소로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이 발명된 것입니다. 구텐베르크 이전에 교황과 교회를 비판했던 이들이 아무리 날카로운 논리로 무장했어도 이들에게는 자신의 논리를 세상에 빠르게 그리고 대교모로 퍼트릴 방법이 부재했습니다.

 

때문에 교황은 자신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이들을 비교적 쉽게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위클리프가 교황을 비난하고 다녔을 때 교황은 위클리프가 주장한 내용을 이단으로 지정했지만, 위클리프 자체는 법정에 세우지 않았습니다. 위클리프를 박해할 경우, 그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에 동조하는 세력이 늘어날 것을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위클리프는 이미 사망한 이후인 1415년에서야 조용하게 이단으로 처리됩니다. 그러나 위클리프의 경우와는 다르게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과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할 무렵에는 더 이상 교황이 이를 조용히 처리하고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일개 교수에 불과했던 루터로 하여금 당대의 교황청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게 만들었을까요?

 

여기에는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교황청의 면죄부, 혹은 면벌부 판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알브레프트 폰 브란데부르크라는 인물은 이미 마그데부르크 대주교로 지내면서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마인츠 지역의 대주교 자리가지 동시에 차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사람이 여러 지역의 대주교를 동시에 지내는 것은 원칙적으로 교황처에 의해서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교황의 특별한 허락을 받기 위해서 돈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는 교황청에서 벌이고 있던 성 베드로 성당 재건축 사업을 위해 돈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둘은 일종의 거래를 하게 되는데 거래 내용에 따르면 알브레흐트 폰 브란데부르크는 당시 신성로마제국 지역에서 막대한 부를 쌓고 있던 푹 가문으로부터 돈을 빌려서 교황에게 지불하는 대신 8년 동안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에서 면죄부를 판매할 권리를 획득합니다.

 

면죄부를 판매해서 얻을 수익의 절반은 다시 교황에게 지불됐고 나머지 절반을 푸거 가문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쓰였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갓 5년 전에 신학 박사가 되고 박사가 된 이후 성경 해석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던 젊은 신학자 루터가 이를 지켜보며 분노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겠죠?

 

면죄부 판매 소식을 접한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알브레흐트 폰 브란덴부르크에게 공개적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그는 편지에서 면죄부 판매라는 잘못된 관행을 중단하기 위한 학술적 토론을 요구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근거를 담은 95개조 반박문을 편지의 끝에 첨부합니다.

 

오늘날에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문에 공개적으로 붙혔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루터가 실제로 이렇게 성벽에 95개조 반박문을 공개적으로 붙혔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알브레흐트 폰 브란덴부르크는 편지를 받고나서 이를 교회에 직접 알리고 루터에게 답변을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답장을 받지 못한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의 내용을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편지로 보냅니다. 그리고 이 편지의 내용은 인쇄술의 발전으로 편지를 직접 받은 이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독일 전역에 사는 이들에게 빠르게 퍼져나갑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 촉발된 폭발적인 사회적 논쟁에서의 핵심은 성경과 관련된 교황의 권위였습니다. 교황청은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했고 루터는 교황청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의 내용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황이라고 한들, 성경에 쓰이지 않은 내용을 설파하면 안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루터가 이런 주장을 한다는 소식을 접한 교황은 교황의 행동에 대한 비판 자체가 이단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면서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자고 했습니다. 이 때 루터가 로마로 소환되었으면 이후 역사의 진행은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다행히 루터가 활동하던 비텐베르크 지역을 통치하던 “현자”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를 보호해줍니다. 이는 현자라는 프리드리히 3세의 별명에서도 드러나듯이 그가 평소 문화와 예술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가 차기 황제 선출을 놓고 정치적으로 교황과 갈등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도 드러나듯이, 종교개혁은 이미 단순한 교리나 종교의 문제를 넘어서서, 정치적 문제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를 로마로 넘겨주는 것을 계속 거부하자 교황은 다음 해인 1518년 추기경이었던 토마스 카예탄을 루터에게 보냅니다. 카예탄은 루터가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도록 유도하는 임무를 지녔고 만약 루터가 이를 따르지 않을 시, 그를 파문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카예탄을 만난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자신의 입장을 번복하지 않을 것은 물론 교황이 아니라 오직 성경의 내용만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반복합니다. 루터의 입장을 확인하고 난 카예틴이 루터에게 “그건 아예 새로운 교회를 만ㄷ르자는 말”이라는 대답을 남겼다고 전해지는데요.

 

이는 교황의 입장에서 루터의 주장이 얼마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는지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카예탄은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입장 사이를 확인하고 나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다시 한 번 루터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지만 프리드리히 3세는 카예탄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한편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인쇄술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1520년, 그는 세 편의 팜플렛 형식의 글을 발표합니다. 이 중 첫 번째는 신성로마제국의 귀족과 황제, 두 번째는 당대의 신학자들, 그리고 세 번째는 일반인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글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상 독자의 눈높이에 맞게 내용과 형식을 달리하는 세 편의 글을 각각 발표했다는 것은 루터가 단순히 자신이 옳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은 나이브한 지식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오히려 그가 자신의 입장을 효율적으로 알리기 위해 상당히 전략적, 그리고 체계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팜플렛 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폭발적으로 읽힌 이 글들을 통해서 루터는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의 원칙을 주장합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이룬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용서 받을 수 있으며 믿음과 예배에 있어서 오직 성경만이 권위를 지닌다는 내용을 교황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음은 당연합니다. 루터가 계속 교황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자, 1520년 6월 15일 교황은 60일 안에 루터가 자신의 인장을 공개적으로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한다는 칙서를 발표합니다.

 

그러나 루터는 60일의 기한이 만료되는 날에 보란듯이 교황의 칙서를 불태웠을 뿐만 아니라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부르며 비난했고 교황은 결국 루터를 파문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시의 법에 따르면 교황이 파문한 이에 대해서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제국추방령이 내려져야 했던 것입니다. 제국추방력에 처해진 자는 법적으로 모든 권리를 박탈 당했고 심지어 제국추방령에 처해진 자를 죽인다고 해도 죽인 자는 처벌을 받지 않는 한 개인에 대한 사회적 보호를 완전히 박탈하는 가혹한 처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언급된 프리드리히 3세를 비롯해, 신성로마제국의 일부 통치자들이 이에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루터에 대한 제국추방령 문제를 분명히 해결하기 위해 1521년, 보름스에서 루터가 직접 홀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 앞에 출석하는 제국의회가 열리게 됩니다.

 

이를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는 루터에게 신변의 안전을 미리 보장해야 할 정도로 상황은 일촉즉발의 위기 상태였습니다. 4월 17일, 마침내 자신 앞에 나타난 루터에게 카를 5세는 이때까지 루터가 쓴 모든 글들을 보여주며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이 글들을 지은이가 루터 본인이 맞는지, 그리고 이 글들에 담긴 주장은 철회할 생각이 있는지 였습니다. 앞으로의 인생을 좌우할 피말리는 상황에서 루터는 첫 번째 질문에는 바로 긍정으로 대답했고, 두 번째 질문에는 다음 날까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고뇌의 밤을 보냈을 루터는 다음 날 카를 5세 앞에서 성경을 통해서 자기가 쓴 글의 내용이 반박되지 않는 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Hier stehe ich, Gott gelfe, mir, ich kann nicht anders, Amen”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와주소서, 저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아멘”이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를 서양에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양심의 자유 혹은 신념의 자유의 출발이라고 보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신념을 저버릴 수 없었던 루터는 결국 제국추방령에 처해집니다. 이제 루터를 지지하거나 보호해주는 것은 물론 그의 글을 읽거나 인쇄하는 것도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카를 5세가 루터에게 의회에 출석하기 위한 신변의 안전을 보장했기 때문에 루터에게는 알아서 도망갈 수 있는 마지막 21일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마지막 희망이 있었습니다. 바로 처음부터 자신을 지지해주던 프리드리히 3세였습니다. 루터는 돌아가는 길에 숲속에서 군인들에게 의해 납치되는데 이는 그를 비밀리에 보호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3세가 꾸민 자작극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3세의 보호 아래 루터는 산 속에 있는 한 성의 감옥 안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백 년 넘게 유럽을 피로 물들인 종교개혁이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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